[뷰어스=이소희 기자] 가수 빌런(VILLAIN)은 ‘노력’ ‘연습’과 같은 표현을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음악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그 안에 담긴 빌런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얼마나 천재적인 재능에 노력을 더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빌보드나 그래미 어워드에서 상을 받은 이들 앞에서 기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도 허무맹랑한 호언장담이 아니다.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당당함에서 비롯된 말이다.
빌런은 스스로 뭘 원하고 잘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가 확인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후회 없이 담아낸 음악 그 자체. 이런 순수함은 곧 자연스러움으로, 또 나다움으로 이어진다. 속으로는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도 그 결과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고요한 강물에 돌 하나를 던질 뿐. 이것이 바로 빌런이 지닌 이중성이다. 그는 진짜 빌런다워질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
(사진=플라네타리움레코드 제공)
■ ‘뱅크 로버’라는 퍼즐을 맞추는 키워드, ‘이중성’
“가수로서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죠. 그동안 온라인 음악 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네 곡밖에 안 나왔잖아요. 빌런이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싶어도 더 들을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는 미니앨범이지만 좀 사이즈 있게 6곡을 준비했어요. 자기소개를 할 수 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2016년 싱글 ‘비가 내리는 밤’에로 데뷔한 빌런은 스타일리시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속삭이는 듯한 R&B 보컬을 더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후 낸 싱글 ‘요정’과 소속 레이블 플라네타리움(PLT)의 앨범 수록곡 ‘몰라’ ‘울긴 왜 울어’에서도 비슷한 결을 유지했다. 그래서 이번 첫 번째 미니앨범 ‘뱅크 로버(Bank Robber)’는 더욱 색다르게 느껴진다. 새 앨범에서는 확실히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에 강렬한 사운드가 주를 이룬다.
“힙합이나 알앤비 신에서는 다들 자신만의 콘셉트가 있잖아요. 어떤 분들은 갱스터 같고, 어떤 분들은 시인 같고. 나는 은행 강도의 느낌을 가져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마냥 나쁜 강도는 아니에요. 영화 ‘인타임(In time)’을 보면 주인공이 기득권인 은행의 돈을 훔쳐서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타이틀곡은 ‘마니또’와 ‘핸콕’ 두 곡. 전자가 콘셉트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라면, 후자는 내면을 파고든 알맹이다. 아티스트 빌런과 사람 빌런을 적절하게 섞어 보여주는 현명한 구성이다.
(사진=플라네타리움레코드 제공)
“앨범을 구상할 때부터 ‘마니또’를 타이틀곡으로 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핸콕’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늘 ‘마니또’를 앞세워 생각했던 앨범이라 이제와 바꾸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두 곡을 선정하기로 했어요. ‘마니또’는 비트가 어둡고 공격적인데, 담고 있는 내용은 따뜻한 이중적인 곡이에요. 앞서 말한 영화 ‘인타임’ 내용처럼 누군가에게는 은행 강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마니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죠. ‘핸콕’은 영화 ‘핸콕’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내용 중 악당이 좋은 일을 하면서 사랑 받는 영웅이 되거든요. 내 성격과 인성을 잘 담아준 솔직한 노래죠”
빌런이 자신의 이중성을 앨범 안에 치밀하게 녹여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봤을 때는 이전 앨범과 ‘뱅크 로버’가 상반된 매력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반전을 꾀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파고들만한 메시지가 많다. 빌런의 이름은 ‘악당’을 의미하는데,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악당의 모습을 추구한다. 이런 지향점은 그가 영감을 얻은 영화 ‘인타임’ ‘핸콕’의 내용에서 앨범명 ‘뱅크 로버’와 수록곡으로까지 이어진다.
“1번 트랙 ‘구해줘’에 ‘영악하고 악하고 약하지’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나의 본성을 잘 표현해줘요. 난 이중적이거든요. 솔직해서 영악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어요. 이런 것처럼 이번 앨범에서는 이전과 달리 ‘얘가 이렇게 악착같은 놈이었나’ 생각을 만들게 하는 가사들을 넣어봤어요. 멜로디로도 거칠고 신랄한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고요”
빌런이 집요하게 밀어붙인 이미지는 첫 번째 트랙부터 흘러나온다. 그 뒤로 나오는 ‘마니또’가 빌런이라는 인물의 실질적인 형체라면, ‘핸콕’은 빌런의 임팩트 있는 등장을 알리는 하나의 현상과도 같다. 이렇게 큰 줄기부터 세세한 곳들까지, 상반된 모습을 중심으로 퍼즐조각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빌런’이라는 사람이 완성된다. 그래서인지 이번 앨범은 변화의 시도라기보다 이제야 알을 깨고 등장할 수 있게 된 계기처럼 느껴진다.
(사진=플라네타리움레코드 제공)
■ “빌런답게 살자고 매일 다짐해요”
“믹스를 50번 가까이 했을 정도로 정말 많은 신경을 썼어요. 원래 노래가 나오면 온라인 음악 사이트에서 듣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앨범작업을 하면서 나 스스로의 팬이 됐고, ‘명반’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웃음) 음악적인 우상들하고 견줘도 쉽게 지지는 않겠다 싶었죠”
빌런의 말에는 ‘내가 이만큼 고생했으니 앨범은 당연히 좋아’와 같은 보상심리가 들어 있지 않았다. 빌런은 그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로 끌어 올렸을 뿐이다. 그의 뉘앙스에는 평가에 대한 걱정과 궁금증이 아닌, 현재 느끼는 음악의 재미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흥분만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무리 뜻대로 전달을 하려고 해도 받아들이는 건 상대방 마음인 거잖아요. 피드백이 어떨까 생각하기보다,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하고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런 것들에 몰두하고 깊이 생각하게 되면 노래가 재미가 없고 인위적으로 변하더라고요. 충동적인 영감에 맡기는 편이에요”
(사진=플라네타리움레코드 제공)
이는 ‘배려’와는 좀 다른 의미다. 빌런은 분명 듣는 이를 고려하고 염두에 둔다. 마지막 트랙 ‘밉상’은 빌런이 중학생 때 쓴 노래로, 다른 트랙과 사뭇 다른 차분한 사랑 노래다. 이에 대해 빌런은 “사랑을 노래하는 빌런을 원하는 분들을 위해 이런 곡을 넣는 것도 내 역할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노래만 앨범에서 튀는 건 아니다. ‘나 너 사랑해’와 같은 주제가 아니라 ‘너는 밉상’이라는 못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앨범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엔딩곡이였다”고 설명했다.
빌런의 자신감은 곧 ‘올곧음’이다. 그는 어떠한 것들을 비꼬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표현할 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데, 빌런의 용기는 이미 발휘됐다.
“자연스러운 게 멋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사람이 가장 예쁘고 멋있는 순간은 자고 일어났을 때라고 생각해요. 엄마한테도 화장하지 말고 다니라고 말하기도 해요. (웃음) 꾸미지 않는다는 건 오히려 치장해 가리는 것보다 더 어렵긴 하죠. 내 현실과 꿈의 괴리를 고려하지 않고 이상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것도 힘들고요. 하지만 부끄럽다고 해서 진짜 모습을 회피한다면 스스로에게 더 미안할 것 같아요. 지금 완벽히 솔직해지진 못 해도 나 그대로를 바라보자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산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해요. 간혹 ‘이기적이다’라는 말을 듣긴 하지만 자신을 모르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게, 존중하며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