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아티스트컴퍼니)
[뷰어스=손예지 기자] “나는 항상 내 캐릭터를 좋아했고 열심히 연기했습니다. 그 중에서 ‘스카이캐슬’이 다른 점이라면 대중에게 나를 각인시켰다는 거죠”
JTBC ‘스카이(SKY)캐슬’(연출 조현탁, 극본 유현미)를 마치고 만난 배우 염정아의 말이다.
지난 1일 종영한 ‘스카이캐슬’은 염정아에게 “고마운 작품”이다. ‘스카이캐슬’ 출연 후 연기 경력 28년 통틀어 유례없는 관심이 그에게 쏟아지는 덕분이다. 드라마에서 염정아는 자녀의 성적과 스펙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믿는 여자 한서진을 맡았다.
“사실 한서진이 누구나 다 지향하는 엄마 상(狀)은 아니잖아요?” 염정아의 말은 정확하다. 대개 드라마가 선한 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반면 ‘스카이캐슬’을 이끄는 한서진은 때때로 악(惡)에 가까운 선택을 보여줬다. 공부 스트레스로 도둑질까지 저지르는 자식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는 대신 돈을 써서 잘못을 덮기에 급급하고, 내 딸을 위해서라면 친구의 아들에게 살인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한다.
그렇기에 ‘스카이캐슬’ 방영 내내 많은 시청자가 한서진에 공감하고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던 현상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중심에 염정아가 있다.
“한서진 캐릭터가 세잖아요. 보통 엄마가 아니죠. 딸 외에는, 캐슬의 다른 엄마들은 물론 남편에게까지 못된 말을 많이 하는 여자거든요. 때문에 어떻게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한서진을 만들까 신경썼습니다”
이에 염정아는 한서진과 자신 사이의 공통점을 먼저 찾기 시작했다. 바로 모성(母性)이다. 그는 “한서진을 (대본과) 다르게 표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면서도 “다만 캐릭터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연기하는 것은 매력이 없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어 “아무리 못된 짓을 하는 인물이어도 인간적인 매력이 보인다면 마음이 가게 되어 있다”며 “특히 한서진이 ‘스카이캐슬’의 주인공인데 시청자들이 죽일 듯이 미워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성애를 강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JTBC)
그렇다면 실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둔 엄마 염정아는 어떤 장면에서 한서진에게 공감했을까. “한서진의 거의 모든 행동을 보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던 그는 “한서진처럼 (자녀 교육에 열정성적으로) 하고 싶지만 못하는 엄마들이 많다는데, 실제로 한서진처럼 할 수 없다. 따라하는 게 가능하다 해도 너무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한서진의 심경을 진심으로 이해한 장면을 몇 가지 꼽았다.
“한서진은 끝까지 예서를 서울대 의대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악마같은 김주영(김서형)에게 딸을 끌고 가죠. 남의 자식이 어떻게 되든 딸의 목표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러다 예서가 튕겨져 나가려고 하니까 설득하려고 이런 말을 합니다. ‘예서야, 엄마는 네 인생 절대로 포기 못해. 돌팔매질을 당하든 조리돌림을 당하든 그거 엄마가 다 감당할게. 넌 그냥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해’ 이 대사를 보면서 ‘결국 이 여자도 엄마구나’ 느꼈죠”
극 후반부 한서진은 결국 양심을 지키게 된다. 딸이 죄책감에 몽유병까지 앓자 결국 진실을 털어 놓기로 결정한 것. 그러려면 예서가 유출된 시험지로 학교 시험을 만점 받았다는 비밀까지 밝혀야 했던 상황이다. 이에 ‘스카이캐슬’ 19회에서 한서진은 ‘이게 밝혀지면 퇴학이든 자퇴든 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은 포기해야 되고, 올해 수능도 못 본다’며 눈물을 쏟은 바, 인터뷰 당시 염정아는 이 대사를 줄줄 읊으며 “마음으로 연기한 장면”이라고 떠올렸다. “중간에 이런 대사도 있었어요. 예서가 네 살 때부터 엄마와 하루에 4~5시간 이상 못 자면서 공부를 했대요. 두 사람이 그 정도로 열심히 했다는 거죠” 이렇게 말하는 염정아의 얼굴에서 ‘스카이캐슬’ 속 두 모녀에 대한 짠한 감정이 스쳤다. 이 대목에서 한서진이 아니라 배우 염정아는 자녀들에게 어떤 엄마일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는 극성스럽게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쳤다”더니 “지금은 (아이들 스스로에게) 맡기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내가 가르쳘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고 웃음 지었다.
“(아이들 공부에 관해) 늘 고민합니다. 누구는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한다는데… 예전에는 이런 데 엄청 휩쓸렸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별 거 아니더라고요. 저절로 깨닫게 되었어요. 물론 아직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생이어서요. ‘스카이캐슬’을 촬영하며 느낀 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직 막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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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스카이캐슬’에서 한서진이 예서를 위해 구매한 스터디큐브가 방송 이후 광고 효과를 봤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스터디큐브란 가정에 둘 수 있는 1인용 독서실 책상 제품의 명칭이다. 염정아에게 스터디큐브를 구매할 의향이 있는지 묻자 “지금은 (집에) 놓을 데가 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촬영하면서 들어가봤는데 정말 독서실이더라고요. 그 안에 들어가면 집중은 진짜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바깥에서 보면 마음이 아파요. 실제로 ‘사도세자의 뒤주같다’는 비판도 있었잖아요. 우리 아이가 그 안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스카이캐슬’ 내내 한서진,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 염정아이지만 한편으로 어려움도 있었단다. “초반부는 재밌게 찍었다”며 특히 ‘아갈머리를 찢어버릴라’라는 대사가 재밌었다던 염정아. 그러나 극이 후반부에 접어들며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장면이 휘몰아치자 부담을 느끼게 됐다고.
“후반부로 가면서 엄청 긴장하고 예민해졌어요. 감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죠. 촬영이 끝나면 마음이 편해지다가도 밤에는 ‘스카이캐슬’ 꿈을 꿨어요. 대사를 계속하는 거예요. 그 중에는 ‘예서야’를 제일 많이 불렀어요(웃음) 예서(역의 김혜윤)에게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으니 다음 (작품에서) 만나면 너 괴롭히는 역할 하겠다’고 했을 정도라니까요. 하하”
극 중 한서진은 예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캐릭터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베테랑 배우들과 연기 경합을 벌이게 된 소감을 털어 놓은 염정아다.
“일단 이수임(이태임)은 좀 쉬웠어요(웃음) 착하고 정직한 인물이니까요. 진진희(오나라)도 편했죠. 남편 강준상(정준호)도 한서진에게는 익숙한 사람일 테니까 어렵지 않았고요. 제일 힘든 건 김주영이었어요. 내가 이기는 것 같으면서도 이겨본 적이 없고, 어떤 여자인지 알면서도 담판 짓지 못하고 휘말리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기가 쪽 빨리더라고요”
앞서 김서형도 ‘스카이캐슬’ 종영 후 가진 인터뷰에서 염정아와 촬영하는 장면마다 고충이 남달랐다고 고백한 바 있다. 특히 자신보다 키가 큰 염정아를 상대하기 위해 높은 굽의 신발을 신어야 했다고. 이 일화를 전하자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염정아는 “그래서 신발을 안 벗고 있었구나? 나는 서형이가 힐을 좋아하는 줄 알았네~”라며 웃음을 지었다.
(사진=JTBC)
염정아는 이어 ‘스카이캐슬’의 여정을 함께한 배우들에 대해 입을 열었다. 우선 “서형이는 (캐릭터와 실제가) 많이 다르다”며 “여리고 조용한 스타일”이라고 소개했다. 오나라에 대해서는 “귀엽고 발랄한 모습이 찐찐이(극 중 진진희의 별명)와 비슷하다”고 했다. 또 “승혜(윤세아)는 원래 훨씬 밝은데 엄청 차분하게 연기했다. (김)병철(차민혁 역) 씨도 완전 다르다. 평소에는 말수 적고 얌전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염정아는 이 같은 베테랑들이 한 작품에 모인 것만으로 시너지가 상당했다고 자평했다.
“특히 첫회 김정난 언니 연기는 너무 놀랐어요. 나랑 같이 촬영한 장면은 평범했거든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촬영한 장면이 정말 예술이더군요. 사실 정난 언니 때문에 우리(배우들)가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앞으로 어떻게 하지?’ 걱정했죠(웃음)”
그러면서 ‘스카이캐슬’ 배우들의 연기를 살려준 제작진의 공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염정아는 “엔딩에 내가 걸리고 ‘위 올라이~’(‘스카이캐슬’ OST 가사)가 나오면 짜릿했다. 내가 연기한 것의 몇 배 효과를 연출로 내준 것”이라며 “조현탁 PD님을 비롯해 촬영·조명 감독님 등은 우리를 예쁘게만 찍지 않았다. 배우의 감정을 다 읽어 화면에 담았다. 그런 제작진이 있어 너무나 마음이 든든했다. ‘스카이캐슬’이 배우들 덕분에 잘 된 게 아니라는 뜻”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JTBC ‘마녀보감’(2016) 이후 다시 만난 조 PD님은 훌륭한 인격을 가진 분이에요. 촬영하면서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큰 소리를 낸 적도 없어요. ‘마녀보감’ 때부터 알았죠. 그래서 나 역시 예민해진 것을 티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고요. 우리 PD님을 힘들게 하는 데 내가 조금이라도 일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카이캐슬’ 역시 조현탁 PD에게 제안받자마자 마음 속으로 출연을 결정했다는 염정아. 차기작 계획을 묻자 “아직은 정해진 게 없다”면서도 “‘스카이캐슬’이 잘 됐으니 제안받는 작품이 늘지 않을까 싶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만으로 좋다. 선택할 작품이 없었던 적도 있다”고 했다.
(사진=아티스트컴퍼니)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같아요. 완성도 높은 책(대본)과 연출해주시는 감독님에 대한 믿음, 하고 싶은 캐릭터가 나타나면 선택하죠. (캐릭터와 연관된) 경험이 많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스카이캐슬’만 봐도 엄마를 연기한 배우들 중 실제 결혼한 사람은 나와 태란이 뿐이었어요. 그 중에서 아이를 키운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요. 그런데도 다들 너무 잘해냈잖아요. 연기 활동을 통해, 또 간접적으로 경험해본 것을 토대로 하는 거예요. 때문에 후배들에게 평소에 여러 작품을 많이 보고, 할 수 있을 때 가리지 말고 많이 연기하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후배들에게 한 조언을 염정아 스스로도 실천 중이다. 데뷔 후 지금껏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거의 쉬지 않고 활동했다. 특히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완벽한 타인’(감독 이재규)이 520만 관객을 동원한 데 이어 지난달 영화 ‘뺑반’(감독 한준희)으로 연기 호평을 듣고 드라마 ‘스카이캐슬’까지 흥행한 데 대해 일각에서는 ‘염정아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이에 염정아는 “와닿지 않는다”며 “남의 이야기 같다”고 얼떨떨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스케줄을 따라 카메라를 들고 오는 팬들을 보면 신기하다고 했다.
“큰 카메라를 들고 종방연에 온 친구(팬)들이 며칠 후에는 공항에도 왔더라고요. 카메라는 어디서 났을까요? 산 건가? 어머, 돈이 어딨어서~팬들에게 선물도 많이 받았어요. 액자에 내 사진을 모자이크처럼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요. 왜, 옛날에 종이학 천알씩 받던 것처럼요(웃음) 또 너무나 정성스러운 편지들까지… 이 친구들은 예의도 바라요. 편지를 읽으면 ‘언니’가 아니라 ‘배우님’이라고 적어요. 내 연기를 보고 좋아해주는 가봐요”
나이 어린 팬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염정아는 “그은 내가 미스코리아인 줄도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염정아는 1991년 미스코리아 선 출신이다. 같은 해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으로 연기를 시작한 염정아는 한때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었다고 했다. 미스코리아 출전 이력이 “내 연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웃는 모습에서 여유가 읽혔다.
(사진=아티스트컴퍼니)
“모든 게 여유로워졌습니다. 나이 들면서 생활도, 사람을 대하는 마음도 여유로워졌죠. 덕분에 연기할 때도 전보다 더 편함을 느껴요. 나이 들어 좋은 점이 이런 것 같아요. 아마 나이듦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괴로웠을 겁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면 편하죠. 마음을 내려놓으면 돼요. (나이듦에 따른) 외적인 변화에 신경쓰면 마음이 슬퍼질 거예요. 그런데 내려 놓으면 대중이 알아주더라고요. 나를 연기로만 봐주는 거죠”
그렇게 어느덧 데뷔 28년이 지났다. 이에 대한 염정아의 소감은 간단했다. “28년, 금방 지났더라고요. 앞으로도 또 금방 지나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