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더블브이 엔터테인먼트
1999년 SBS ‘남희석 이휘재의 멋진 만남’에서 이상하게 등장한 두 남자가 있었다. 둘 다 비주얼은 요즘말로 ‘빻았’었다. 한 명은 머리카락마저 없었다. 방송가에서 크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클놈’이었다. 클놈 지상렬과 염경환은 십 수 년이 지나 한국 예능계의 빼놓을 수 없는 반백 살이 됐다. 특히 ‘언어를 창조하는 남자’ 지상렬은 어딜 가든 터지는 ‘예능 치트키’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1999년 나이 서른에 데뷔해 벌써 20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에 매체는 끊임없이 변했다. 지상파3사만 있었던 TV시대에서 인터넷 시대를 거쳐 케이블·종편 등 채널 확장에 이어 이제는 유튜브 시대에 와 있는 동안 지상렬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소위 ‘언어 창조 개그’와 함께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오는 억울한 얼굴, 예상 밖의 상황극까지 지상렬의 재능은 천부적이다. 하늘의 명을 알게 되는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지상렬을 최근 만났다. “새치기 하지 말고, 받은 게 있으면 베풀 것”이라는 그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줬다.
◇“‘마실’ 자연스럽게 술 마시고 싶었다”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로 떴다하면 포털사이트와 온라인을 장악하는 지상렬이 유튜브로 향했다. Mnet 디지털 스튜디오 채널인 M2 ‘마실’이다. 놀러 나간다는 옛말과 술을 마신다는 중의적 의미를 갖고 있다. 지상렬이 서울·경기·인천 등지에서 제작진이 섭외한 연예인들과 술을 마시는 프로그램이다. 혀가 꼬일 때까지 먹어서, 영상 말미에는 약간의 혼돈이 존재한다.
소두든 맥주든 ‘짝’으로 마시는 연예인으로 알려진 지상렬이지만, 그래도 연예인인데, 카메라 앞에서 술 마시는 건 약간의 두려움을 주지 않았을까. 대답은 ‘놉’이었다.
“제작진에서 연락이 왔어요. 술을 먹으면서 방송하는 거래요. 정말 9:1도 고민을 한 했어요. ‘술 마시면서?’ 정도의 퍼즈(Pause)만 있었어요.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하고 싶었던 거예요. 내추럴 한 거. 사실 술은 얘기하는 도구잖아요. 의지는 하는데, 치우치자는 건 아니었어요. 술 먹을 줄 아는 친구들끼리 릴렉스하게 먹어보자 이거였죠.”
그리고 바로 촬영 날짜를 잡고 시작했다.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그냥 제작진이 오라는 장소로 갔다. 하이라이트 레코즈가 나와 있었다. 래퍼 팔로알토가 주축인 힙합 레이블이다. 지상렬은 이들을 잘 몰랐다.
“가니까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하는 거죠. 저는 녹화하러 갈 때 써치(Search)도 잘 안 해요. 그냥 아는 만큼 알고 가는 거죠. 써치 들어가는 순간 날 것이 아니에요. 궁금하긴 한데 가서 모르는 거 있으면 배우고 그러면 되죠. 야구선수 커쇼 아시죠? 우리는 커쇼가 뭘 잘 던지는지 알잖아요. 그 정도만 알면 됐지. 더 알 필요 있나요. 어차피 그래도 ‘기본빵’은 하니까. 작가들한테도 너무 구구절절 설명하지 말라고 해요.”
하이라이트 레코즈와 지상렬의 만남은 정말 놀라운 조합이다. 팔로알토와 G2는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그 외 인물들은 유명세가 없었다. 지상렬을 만나 반가운 2030 래퍼들은 “형님 좋다”는 말만 되뇌었다. 대화가 오고 갈만 하면 “형님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맥을 끊은 래퍼도 있었다.
“하이라이트랑 먹고 좋았던 게 누구한테 공격적이지도 않고, 자기 박스 잘 지키면서 먹더라고요. 흘러가는 대로 먹었어요. 독특한 친구가 있긴 했는데,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온도 좀 올라갈라 하면 찬물 끼얹고 하는 친구들이요. 진짜 술자리 같아서 정말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 나이 먹고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 맺는 게 쉽지 않아요. 이렇게 인연을 맺은 것만으로도 정말 좋았죠.”
사진제공=더블브이 엔터테인먼트
◇“뭣 하러 불편하게 부탁을 해요”
하이라이트 레코즈를 시작으로 하하, 이승준, 리듬파워, 이천수, 김용명, 김상혁, 딘딘, 남우현, 솔비 등 다양한 인물들이 ‘마실’을 찾았다. 지상렬과 가까운 인물이 있는가 하면 남우현처럼 예능에서 만나기 힘든 인물들도 많았다. 지상렬은 섭외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랑 친한 애들도 있고, 아닌 사람들도 있는데 제가 섭외한 건 누구 한 명도 없어요. 부담 주는 걸 정말 싫어해요. 하하가 나오는 것도 전날인가 알았어요. 처음에는 다들 당황하더라고요. 카메라 하나 달랑 있으니까. 하이라이트 영상이 나오고 나서 그 때야 ‘보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의외로 지상렬은 대화를 주도하지 않는다. 주로 게스트들한테 멘트가 위임된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방송에서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제가 술 마실 때는 좀 듣는 편이에요. 조승식 PD가 저를 잘 모르니까 하이라이트랑 먹을 때는 화난 줄 알았대요. 직접 듣지는 않고 매니저한테 건너서 들었어요. 근데 말 안했어요. 어차피 몇 번 하다보면 알 거 아니에요. ‘저 형이 술이 어느 정도 되면 말을 듣는데 치중하는구나’라는 걸요. 제가 술이 되면 될수록 말수가 줄어요. 이제는 알겠죠.”
사진=M2 '마실' 캡쳐
◇“유튜브는 내가 원했던 플랫폼”
‘마실’에서의 지상렬은 방송에서 보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단순히 웃기는 개그맨이 아니라, 동네 친한 형 같고, 때로 의지하고 싶은 삼촌 같다. 묵묵히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가볍게 등을 토닥여주는 뚝심 있는 어른의 이미지다. 꾸밈없는 모습에서 단단한 등대 같은 느낌을 준다.
날 것을 보여주는데 익숙한 유튜브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지상렬의 만남은 이렇게 시너지를 냈다. 오랫동안 원했던 플랫폼이 등장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제가 지향했던 매체가 생긴 거예요.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 담긴, 날 것 그대로 인거죠. 저는 예전 초창기 때부터 솔직한 걸 원했어요. ‘서세원쇼’ 토크박스에서 나이트클럽, 부킹, 이런 얘기 제일 먼저 꺼낸 게 저였어요. 그 전에는 그런 얘기 못했어요. 다단계 당한 얘기 이런 거 그전에는 꺼내기 쉽지 않았거든요. 제가 이런 류의 트라이를 많이 했죠. ‘마실’에서는 진짜 기저귀만 차고 다 보여줬어요. 무장해제 해서.”
기저귀만 차고 다 보여줘서 터진 인물이 김용명이다. tvN ‘코미디 빅리그’와 KBS1 ‘6시 내고향’ 외에는 이렇다할 족적이 없었던 그는 ‘마실’에만 두 번 나와 엄청난 웃음을 터뜨리고 갔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무시를 못해요. 저는 이거 할 줄도 몰랐고, 김용명이 나올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어지더니 ‘팡’하고 터지더라고요. 솔직히 ‘마실’에서 김용명 하나 터진 거예요. 멘트에 자신감이 생겼더라고. 그 허들을 넘느냐 못 넘느냐가 중요해요. 그 허들 못 넘으면 일어나기도 힘들어요. 트라우마도 생기고 그런데, 어찌됐든 바지가랑이 걸리면서도 넘어가면 탄력 받는 거예요. 용명이는 탄력 받았어요. 앞으로 잘 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