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놓는 것이 절약하는 비결"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최근 생긴 좌우명입니다. 아이라이너는 1년 전에 비해 600원, 지난해 이맘때 구입했던 스타킹 1팩은 1000원 올랐더군요 먹거리는 한달에 한번 대부분 같은 상품을 구입하는데, 지난달에 비해선 5700원이 늘어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오래 고민하던 습관은 사치가 됐습니다. 마치 앉아서 도둑에게 지갑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죠.
올해 들어 정부가 '먹거리 가격통제'에 드라이브를 거는 배경입니다. 올해 초부터 정부는 라면, 제분, 외식프랜차이즈 등 먹거리 제품 기업들을 중심으로 사실상 가격 동결을 다방면으로 압박중입니다. 식품업계는 일단 가공식품 물가 안정에 적극 화답했지만, 지난해부터 안 오른 비용이 없어 고심이 깊어지는 중입니다.
결국 최근에는 유업계가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유업계 1위인 서울우유는 오는 10월1일부터 대형할인점에 납품하는 서울우유 ‘나100%우유’ 1000mℓ 제품의 출고가 인상을 3% 수준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따라 매일유업과 남양유업도 같은 수준으로 인상폭을 결정할 것으로 전망되는데요. 이들은 지난 7월 낙농진흥회가 원윳값을 10년 만에 최대 수준인 리터(ℓ)당 8.8% 인상하자, 농식품부로부터 두차례나 불려간 바 있었습니다.
◆생존위기에 내몰렸는데…울며 겨자먹는 유업계
우유산업은 오래전부터 저출산 여파로 흰우유 소비량이 감소하면서, 사양산업 중 하나로 꼽혀왔습니다. 여기에 수입유제품의 공세까지 더해지면서 위기를 맞자 사업다각화를 통해 이를 넘기고자 발버둥 쳐왔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낙농업 역사가 곧 서울우유의 역사'라 할만큼 80여년간 한국 대표 우유로써 우유 외길을 걸어왔던 서울우유까지 눈을 돌렸을까요.
실제 서울우유는 갈수록 쪼그라드는 국내 우유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5년여 전 우유에 치중됐던 사업비중의 틀 깨기에 나섰습니다. 디저트 외식시장을 공략하고 유제품을 확대하는 등 신사업에 도전한 것인데요. 그러나 외형만 커졌을 뿐 실속이 없는 상태입니다. 실제 서울우유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9981억원으로, 문진섭 조합장이 2019년 취임 당시 약속했던 '연매출 2조' 공약에 한층 다가서고 있지만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29% 줄었죠. 당기순이익(경영공시를 확인할 수 있는 최근 8년만에)은 첫 손실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제품을 팔아 얼마를 남기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서울우유가 자체생산하는 제품사사업만 놓고 보니, 매출에서 원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80%초반대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올해 상반기 들어선 82.85%까지 올라섰는데요. 1000원어치 팔아 172원 남겼다는 의미입니다. 남양유업도 마찬가지더군요. 남양유업은 지난해 1000원어치 팔아 161원을 남기다가 올해 상반기 그나마 200원 수준을 거둬들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남양유업은 내부적으로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2019년부터 줄곧 적자운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2020년부터 3년간 지속된 영업적자는 매년 700억원대에 달하고 있죠. 두회사의 해당 매출에는 우유를 비롯한 발효유 등이 포함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흰우유는 납품가 기준으로 이익률이 1% 수준이란 업계 하소연이 허투루 들리진 않습니다.
제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원가에는 원료비 뿐만 아니라 운송비, 인건비, 임차료 등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비용이 늘어 생존위기에 놓인 유업계에게 가격 통제 카드는 가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정부는 밀가루·라면 등에도 가격 인상 자제 요청을 했습니다. 현재 라면업계는 글로벌 시장에서 수출호조를 보이고 있어 정부의 입장에 일시적 동참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식품업계 공통적으로 유난히 영업이익률이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업계 고심이 깊어질 수 밖에 없겠죠.
◆국경 봉쇄·통화량 증가·원유곡물 공급부족까지…인플레이션 불씨에 기름 부은 '팬데믹'·'전쟁'
출처=남양유업 사업 및 반기 보고서.
인플레이션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고 가계 씀씀이가 늘어 수요가 증가하거나 ▲제품 생산비용이 증가하면 가격이 상승하거나 ▲공급이 부족할때 물가가 오른다는게 전문가들의 조언입니다. 팬데믹 확산으로 글로벌 국경 봉쇄에 나서면서 지구촌 공급사슬에 균열이 생겼고 공급부족은 제품가격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서민들의 생존을 위해 전세계 정부가 시중에 돈을 쏟아부어 통화량이 증가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공급망이 붕괴되면서 물가 폭등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렇게 서민물가 안정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한국 정부의 선택은 '가격 통제'입니다. 그러나 가격 통제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비판적 시선이 공존합니다. 지난해 미국과 영국의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자 '가격통제론'이 부상했는데 이에 대해 유럽중앙은행(ECB)은 "물가 통제는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당사자에 부담을 전가할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면 기업이 원재료 값 상승분을 고스란히 떠안아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죠.
기업의 가격통제는 '탐욕 인플레이션(인플레이션의 책임을 기업의 가격인상과 이윤 증가에 돌리는 주장)'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물가 인상은 ▲팬데믹과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균열 ▲화폐량의 증가 등에서 유발됐죠. 물가 안정을 위해 이미 생존전략에 돌입한 산업에게까지 민생고 책임을 떠넘긴다면, 유업계처럼 살기위해 안간힘 쓰는 기업들에게는 마케팅 및 구조조정 등으로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선택만이 남습니다.
정부의 가격통제 범위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습니다. 가격통제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단기 대책이 될 수 있으나 오늘날 물가상승이 코로나19 팬데믹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종합선물세트로 증폭된 것임을 감안하면, 경기침체와 기업 파산과 같은 후유증을 낳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현재까지 400여개 기업이 파산했고, 일본에서는 올해 상반기 기업도산이 4000여건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불과 한달전만해도 정부의 총체적 부실운영으로 국가적 망신을 받을 위기에 놓였을 때 심폐소생술에 나선 곳은 우리 기업들이었습니다. 태풍과 산불 등으로 피해를 봤을때도 어김없이 지원의 손길을 내미는 곳은 우리 기업들입니다. 유가, 원재료 등 제품 생산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당장 물가 관리에 쉬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표적이 된 유업계가, 나아가 식품업계가 재무적 손실이 클 수 밖에 없는 '가격통제'에 따르다 존폐위기에 내몰릴까 우려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