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경제는 산업과 금융, 두 개의 큰 바퀴로 굴러간다. 산업 분야에선 이미 삼성전자라는 세계 1등 기업의 DNA를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금융 분야는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이 배출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답답하고 초라한 상황이다. ‘금융의 삼성전자’는 대한민국 경제의 오랜 화두이자 숙제다. 뷰어스는 K금융의 유일한 해법으로 꼽히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과제와 한계점, 금융당국과 금융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자료=한국금융연구원(우리나라 금융산업의 해외진출 전략에 대한 연구-은행업을 중심으로)
미국 경제지 포춘(Fortune)이 해마다 발표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 명단의 추이를 살펴보면 한국 기업은 2007년 12개에서 2023년 18개로 6개 늘어났다. 500대 기업 보유 국가 순위도 세계 10위에서 6위로 4계단 상승했다. 작년에는 영국(15개)도 앞질렀다.
하지만 해당 기간 금융 분야만 놓고 보면 2007년에도 삼성생명, 국민은행 2개, 16년 뒤인 2023년에도 삼성생명, 국민은행 단 2개뿐이다. 성장이나 발전 없이 답보만 지속하는 상태다. 삼성생명(224위→496위)과 국민은행(364위→339위)의 순위만 바뀌었을 뿐이다.
■ 환경탓? 사람탓?...해외진출이 유일한 해법
이유를 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1997년 외환위기 여파, 관치금융의 역사, 불합리한 규제와 간섭 등등. 하지만 엄밀히 보면 산업 분야도 환경이 최악이긴 마찬가지였다. 삼성전자와 포스코, 현대차 등이 환경 탓을 했다면 현재의 글로벌 기업 지위를 누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문제인가. 금융에는 불행히도 이건희, 박태준, 정주영 등의 불세출의 경영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게 보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금융은 화이트 칼라의 대표적인 선호 분야로, 건국 이래 줄곧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을 흡수해 왔다. 행정고시 수석도 산업자원부가 아니라 늘 기획재정부가 채갔다.
산업이 고군분투할 동안 금융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치고 올라왔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금융 분야가 답보 상태로 주춤하는 사이 산업 분야마저 경쟁력이 크게 위협받고 있다. 앞서 살펴본 글로벌 500대 기업 중 한국 기업이 포함된 업종은 반도체, 에너지 등 특정 분야에 쏠려 있다. 우주항공, 헬스케어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 한국 기업은 전무했다. 이는 한국 금융이 내수를 기반으로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역할에만 충실해서는 더 이상 성장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국제 금융 월간지 ‘더 뱅커(The Banker)’가 제공하는 세계 1000대 은행 순위(자산규모 기준)를 보면 KB금융 64위, 신한금융 66위, 하나금융 72위, 우리금융 81위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해외진출 전략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내놓은 이충열 고려대 경제통계학부 교수는 “최근과 같은 2%대의 경제성장률을 고려할 때 4대 금융지주가 국내를 중심으로 영업을 수행한다면 현재의 60위 이하 국제 순위에서 40위나 30위에 포함되는 것은 상당 기간 동안 불가능하다”며 “국내 대형은행 간의 합병이 이뤄질 경우 가능하겠지만 이 역시 국내 경제 환경을 고려할 때 쉽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결국 국내 은행들이 대형화를 추진하는 유일한 방법은 해외로 진출해 사업 지역을 확대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못박았다. 삼성전자가 전 세계인을 고객으로 갤럭시 휴대전화를 팔듯 금융 분야에서도 전 세계인을 고객으로 삼는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 탄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일본 3대 금융그룹, 영업수익 40% 해외서 번다
우리에게 쉽지 않은 도전인 ‘진정한 글로벌화’를 이웃나라 일본의 금융회사들은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어 주목을 끈다.
지난해 7월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의 3대 대형금융그룹(MUFG, SMFG, Mizuho)의 2022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기준 연간 순이익은 전년 대비 5% 증가한 2조5000억엔을 기록했다. 이는 최근 9년래 최고 수준이다. 2023회계연도에도 3사 합계 순익은 2조7000억엔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3대 금융그룹은 영업수익의 약 40%를 해외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이는 최근 10년새 2배 이상 증가한 규모다. 해외사업의 지역 비중은 아시아 40%, 북미 등 아메리카 35%, 유럽 등 기타 지역 20%로, 전 세계에서 골고루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다. 동남아 시장에 특화돼 있는 우리나라 금융지주사들과 달리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시장을 적극 공략 중인 점이 눈에 띈다.
일본 역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약 10년 동안은 동남아 등 신흥국 시장에 공을 들였다. 일본의 저성장, 저금리 심화로 잉여 유동성 관리가 어려워짐에 따라 유동성 수출에 적극 나선 것. 하지만 코로나19 기간을 포함한 최근 5년 동안에는 현지 금융기관과의 전략적 제휴는 물론이고 현지법인, 지분투자 등 진출방식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직면한 유럽계 은행들의 해외사업 부문을 인수하거나 프로젝트 파이낸싱, 신디케이트론, 항공기 금융 등 글로벌 IB 부문으로 사업 분야를 확대하고 나선 것이다.
백종호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 금융그룹이 과거 지점, 사무소 중심의 은행 위주 사업에서 현지법인 및 지분투자를 기반으로 한 현지고객 영업은 물론, IB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며 “최근에는 비효율사업 재편과 함께 디지털·비은행, 인프라·ESG 등으로 지역, 진출방식, 사업 분야를 확장해 왔다”고 소개했다.
그는 “국내은행의 경우 기업들의 해외법인 금융지원 목적으로 해외영업을 확장해 이자이익 중심의 사업모델을 고수함에 따라 해외 수익 비중이 10%대에 불과하다”며 “국내 금융회사도 해외사업 확대를 통해 수익구조 다변화 및 신성장 동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