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2023년 5월 9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해외 투자설명회(IR)에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 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 홍원학 삼성화재 대표이사 등과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자료=금융감독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마주하고 있으면 떠오르는 잡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작년까지는 맞았는데 올해 갑자기 맞지 않는 일들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국부유출’ 논란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위기는 누군가에게는 기회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회 삼아 국민·신한·하나은행이 톱3 자리를 꿰찼죠. 외국자본들도 기회를 보고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펀드가 은행을 삼키며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두는 일도 발생했죠.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생기고 국민 정서는 나빠졌습니다. 외국계 자본이 국내서 수익을 빼내 본국으로 송금하면 곧바로 ‘국부유출’ 논란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한때 SC제일은행은 국부유출 가게의 단골 손님이었습니다.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영국계 다국적 은행 SC그룹은 2009년부터 꾸준히 SC제일은행으로부터 배당을 챙겨갔습니다. 14년 동안 총 금액은 2조7610억원에 달합니다. SC제일은행 노조는 “은행에 투자돼야 할 돈이 배당으로 빠져나가 은행의 건전성마저 해칠 수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사석에서 만난 토종 은행 사람들도 “투기자본 행태와 다를 바 없다”며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SC제일은행의 배당성향은 글로벌 평균과 비교해 과한 편은 아닙니다. 2022년의 경우 1600억원 현금배당을 실시해 41%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2019년에는 6550억원을 배당해 208%라는 상식 밖 수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만, 평균적으로는 40~50%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JP모건, 씨티 등 미국 5대 은행이 60% 이상인 것에 비하면 결코 과하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작년 이맘때 SC제일은행은 ‘천문학적 고배당’이라며 뭇매를 맞습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고배당을 자제하라고 권고까지 한 상황에서 외국계 은행이 배짱으로 국부유출을 일삼는다며 여론도 곱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워낙 오래 전부터 연례 행사처럼 나오던 지적이라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국내 시중은행들의 배당성향이 20%대였으니 이익에 비해 많이 가져가긴 하나 보다 여길 구석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고배당 자제를 권고하던 금융당국이 올해 갑자기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에 ‘낮은 배당성향(10년 평균 26%)’도 있다면서 주주가치 존중 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주식시장은 환호했고 금융지주 주가는 실로 오랜만에 급등세가 연출됩니다. 배당성향도 1년 만에 30%대 중반으로 약 10%포인트 상승했습니다.
고배당이 문제였다가 갑자기 저배당이 문제인 시대가 돼버렸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배당에 페널티를 가하던 당국이 180도 태도를 바꾸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입니다. 운전을 이런 식으로 했으면 사고까지는 몰라도 최소 멀미는 날만 합니다. 총선용 증시부양책임을 감안하더라도 당국자가 조변석개의 모습을 보이면 민망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할텐데 그런 모습을 찾아보긴 어려웠습니다.
1년 전 다른 장면도 있습니다. KB국민카드는 지난해 3월 이사회를 다시 열어 2022년 결산기준 현금배당 재조정을 결정했습니다. 당초 3501억원의 배당금을 모회사인 KB금융지주로 보내려 했는데 당국이 제동을 걸어 2000억원으로 낮춘 것이죠. 배당성향은 92.5%에서 52.8%로 축소됐습니다. 국민카드는 당국의 ‘고배당 자제’ 경고를 무시하고 순익이 감소했음에도 오히려 배당을 늘렸다가 금감원의 고강도 조사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두 달 뒤 이복현 원장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금융권 공동 기업설명(IR)에 나서서 “금융사들의 주주환원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의 낮은 PBR 문제에 대해 입장을 묻자 시장의 자율에 맡기겠다고 답한 것인데요. 두 달 전 카드사들에게는 ‘손실흡수능력’을 문제 삼아 칼을 휘둘렀던 것을 떠올리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참 헷갈리는 게 한국의 현 금융시장 현실인 것 같습니다.
당국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뒤 시장의 관심사는 금융지주 가운데 누가 먼저 주주환원율 40%를 넘기느냐로 모아지는 분위기입니다. 벤치마킹한 일본의 경우 대형 은행들이 40~60%의 주주환원율을 공표한 상태입니다. 기대대로라면 우리나라의 은행 지주들도 40%를 넘어 50%, 60%로 나아가겠죠.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잡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당국에 대한 신뢰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나라의 제대로 된 정부는 정책을 수요자들과 충분히 소통하며 예측 가능하게 입안합니다. 공명정대하게 집행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요. 상황에 따라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면 정책은 신뢰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오히려 당국 스스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이유가 되어버립니다.
최근 만난 신영증권 김학균 리서치센터장의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한국이 벤치마킹한 일본의 성공 사례는 사실 아베 집권 이후 10여 년 꾸준히 집행돼 온 결과물이라고요. 꽃은 지난해에 만개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준비 기간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의 미래가 문득 궁금해지는데요. 입안 과정이야 어찌됐든 집행 과정만이라도 공명정대하게 진행돼 금융당국이 문제의 원인이 아닌, 해결사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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