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삼성전자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주력인 반도체시장에서의 장악력이 예전보다 못하고, 휴대폰이나 가전 등에서도 쉽지 않은 모습이다. 여기에 미래에 대한 비전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위기론의 골자다. 이에 뷰어스는 '삼성전자 위기론' 기획을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기회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짚어본다.
지난 5일 삼성전자는 시장의 기대를 뛰어넘는 1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했다. 매출액은 5개 분기만에 70조원을 넘었고, 영업이익은 전년동기의 10배를 넘는 수준을 기록했다.
삼성전자가 어닝서프라이즈를 보이면서 그동안 퍼지던 '삼성전자 위기론'도 한풀 꺾인 모양새다. '이제 반도체 호황이 다시 도래해 삼성전자가 날아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부쩍 늘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삼성전자 위기론'은 단기적인 실적의 증감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특히 최근 몇년새 글로벌 정세의 변화, 반도체 다운텀 등으로 인한 위기로 인해 삼성전자의 부족한 점이 많이 드러나면서 무조건 긍정적으로 내다 보기 어렵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손기호 기자)
◆ 메모리 의존도 줄이기 노력에도 성과 더뎌
전문가들은 우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체질, 즉 메모리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경기나 업황에 크게 좌우되는 점을 문제로 꼽았다.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인 메모리반도체는 데이터 저장을 위해 활용되는 범용 제품이다. 따라서 경기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반면 다품종 소량생산이면서 소비자의 요구에 맞춰 제조하는 시스템반도체는 경기 상황이나 소비 감소 등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당연히 가격 변동도 메모리가 심하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2022년 반도체 기업 매출 1위를 차지했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TSMC에 1위를 내주며 4위로 내려앉았다. 2위 인텔, 3위는 2022년 8위에서 5단계나 오른 엔비디아다. SK하이닉스도 재작년 5위에서 7위로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업체의 매출은 대량생산 방식의 메모리 업체가 높지만, 최근 이같은 공식마저 깨진 것이다. 게다가 수익성은 메모리가 시스템반도체를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에 맞춤형 칩을 공급하는 브로드컴의 영업이익률은 60%가 넘는다.
물론 삼성전자 역시 이같은 문제를 파악, 10여년전부터 반도체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파운드리 사업에 집중 투자해 메모리와 비메모리 모두 글로벌 1위에 올라서겠다는 비전이다.
하지만 성과는 아직 미미하다. 글로벌 파운드리 점유율 순위만 본다면 2위지만 1위인 대만 TSMC와 차이가 상당하다. 작년 4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1.3%, TSMC는 61.2%다.
게다가 최근 몇년새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를 둘러싼 지형 변화가 많았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런 상황에서 M&A 등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AI 시대를 맞아 엔비디아와 같은 반도체 설계 업체들의 중요성이 커졌는데 이와 관련된 삼성전자의 뚜렷한 방향을 보기 힘든 상황이다.
삼성전자 HBM3E 12H D램 제품.(사진=삼성전자)
◆ 차세대 메모리 'HBM'에서 SK에 밀려
다른 우려는 삼성전자를 반도체 최강 기업으로 이끌고 있는 주력 부문인 메모리와 관련돼 있다. 쉽게 말하면 그동안 초격차 기술로 타사보다 두세발 빠른 경쟁력을 확보해 왔는데, AI 시대가 되면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대표적이다. 사실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전자는 언제나 추격을 당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AI 시대의 핵심으로 떠오른 HBM 시장에서는 추격하는 입장이 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점유율 53%로 1위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38% 수준이다. 4세대인 HBM3의 경우 SK하이닉스가 9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추정도 나온다. D램이나 낸드 등 메모리 업계에서는 부동의 1위인 삼성전자에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삼성전자의 판단 착오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HBM에 대한 준비는 삼성전자가 먼저 시작했다. 2010년대 중반 HBM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관련 분야 연구와 시장 상황을 보던 삼성전자는 2018년 TF를 해체하고 반도체 수익성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관련 시장이 커지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본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후 관련 조직 인원들이 SK하이닉스로 건너가 HBM 개발을 주도했다는 후문도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예상과는 달리 AI 시대가 빠르게 열리면서 HBM은 차세대 메모리로 각광받고 있다. 이에 삼성전자 역시 다시 공격적인 투자로 SK하이닉스 따라잡기에 나선 모양새다.
관건은 내년 본격적으로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6세대 HBM인 HBM3E 경쟁이다. 삼성과 SK, 그리고 마이크론테크놀러지까지 이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겠다는 목표다. 다만 현재까지는 SK하이닉스가 한발 앞서 나가는 모습이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업계에서 처음으로 HBM3E 양산을 시작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삼성전자는 차세대 메모리에서 계속 추격만 하는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A대학 전자공학과 교수는 "위기에 강한 삼성이라는 믿음은 있지만, 과거 삼성전자가 두세단계 앞을 내다보고 연구개발을 하고 투자를 했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에는 그런 혁신적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HBM 시장을 보면 삼성과 SK가 양분하는 구도가 한국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하지만 마이크론의 도전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미리 내다보고 준비하는 DNA가 여느때보다 더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