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보편관세, 미·중 무역전쟁의 격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권력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세계 경제가 불안정한 상태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선 비전을 제시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리더가 절실하다. 허나 한국 경제는 수개월째 정치적 리더십 공백에 빠져 있다. 기업들 역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하겠지만, 탄핵 찬반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그 공백이 빠른 시간내 안정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디 정치 리더십이 조속히 회복되길 바랄 뿐이다.

당장은 정치 리더십 문제 해결이 절실하지만 사실 경제 분야에서의 한국 기업의 리더십 문제는 훨씬 오래된 과제다. 한국 경제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재건 과정에서 ‘재벌’로 대표되는 가족 경영체제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회장직과, 이를 둘러싼 세금 회피 기법 등은 오랜 기간 구설수와 사법적 사건의 원인이 되어 왔다.

이런 재벌 가족은 한국 사회서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국내서 종종 재벌을 드라마 소재로 활용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 기업가의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한편으로는 비판의 대상이기도 하다. 많은 재벌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기업가 가족의 모습은 흑막에서 음모를 꾸미거나 불법적 행위를 저지르는 모습들로 많이 그려진다.

비판과 부러움을 동시에 받던 재벌 가족 체제라지만, 기업이 잘 운영돼 가문의 부가 커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가족 경영체제 하에서 기업들이 지속적으로 부진한 성과를 보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때 초격차 기술력과 세계 최고 브랜드 가치를 자랑하던 삼성전자는 선대 이건희 회장 사후 지난 10년간 경쟁력 약화와 중국에 대한 기술 추격 허용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SK그룹 역시 반도체를 제외한 주요 사업 부문에서 부채 부담 조정에 집중하며 핵심 자산을 매각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기업 넘버 1,2가 이럴진데 다른 집안들도 마찬가지다. 2010년 한국 주요 기업집단들의 최근 15년 성과를 보라. 이익은 쪼그라들고 기업가치는 10년 동안 역성장한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주요 재벌기업들의 역성장은 한국경제의 노쇠화와 글로벌 경쟁환경이라는 거시적인 요인 탓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기간 창의적 아이디어와 새로운 사업 모델로 고성장을 이뤄내서 재벌기업들 못지 않은 기업가치를 이뤄낸 크래프톤, 하이브, 알테오젠, 에코프로 같은 기업들도 여럿이다. 다만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성장 산업이 아닌데도, 전통산업 내에서 변화를 선도한 기업들이다. 메리츠금융그룹은 2011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이후 전문 경영인에게 대폭의 권한을 위임하며 주가가 60배 이상 상승하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했다. 이는 세습 경영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유와 경영을 명확히 분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업 지배구조에는 정답이 없다. 재벌 지배구조는 장기간에 걸친 관점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기에 용이하다. 단기 실적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 경영 체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 있다. 한국 경제를 일으킨 중후장대한 산업의 발전은 다 이런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나올 수 있었다. 중국이 강력한 산업화에 성공한 것도 정부가 재벌처럼 장기적인 대규모 투자를 일관성 있게 진행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대기업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낳을 때부터 경영 능력을 타고 나는 것은 아니다. 또 변화된 사업환경에서 집안이 갖고 있는 노하우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기존의 체계가 통하지 않을 수 있고 새로운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경영진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세습체제의 회장님들은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막강한 권한을 갖고 회사의 주요한 문제들을 죄다 결정하지만, 그 결정이 올바른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돼도 계속해서 경영권을 유지한다. 회장님 밑에 있는 월급쟁이들만 옷을 벗을 뿐이다. 새로운 월급쟁이가 들어온다고 해도, 회장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회사 기조는 바뀌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하고 경영진이 갈려나가지만 독재자 회장님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회사의 부진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벌 지배구조는 단기 실적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 투자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급변하는 현재 경제 환경은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한 가족이 독점하는 과거의 경영 방식 이상의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해 경영의 유연성을 확보하고, 경영능력의 혁신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 최대의 기업집단을 거느리고 있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렌 버핏은, 경영권을 위협하지 않는 강력한 대주주가 존재하면서도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는 구조가 가장 이상적인 지배구조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 재벌기업들은 대부분 전문 경영인이 있다. 기업가치가 10년전 그대로이거나 추락한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런 기업들은 전문경영인에 대한 완전한 권한 위임이 이뤄지지 않는다. 완전한 위임이란 경영진 이하의 모든 인사 권한을 주는 것이고, 일정기간 동안 간섭받지 않으며, 그 기간의 성과를 평가해 책임과 보상을 충분히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가족기업들의 전문경영인들은 인사와 재무의 중요 의사결정을 결국 회장님 뜻대로 해야 하고, 기업가치에 연동된 보상도 받지 못한다.

소유과 경영을 가문이 독점하는 형태에서, 필자는 가문은 소유하고 경영은 전문가를 찾는 소유-경영의 분리가 변화무쌍한 현대 경제 환경에서 기업들이 지속성장할 수 있는 토대라고 본다. 진정한 소유-경영 분리를 이룩한 첫 사례가 메리츠금융그룹이다. 역시 전통적인 업종이고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있지만, 오리온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이후 꾸준한 성과창출을 하고 있다.

한국은 좋은 기업지배구조를 가질 수 있는 토양이 있다. 한국 특유의 지주회사 체제가 이런 이상적인 기업지배구조를 실현시킬 수 있는 플랫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재벌 가문들은 지주회사의 오너로서 소유권을 갖는다. 대신 지주회사가 소유한 계열사들의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지주회사는 전체 기업 집단에서 장기적인 사업포트폴리오 관리에만 집중할 수 있고, 개별 자회사는 전문적인 경영시스템을 갖춤으로써 모두가 윈윈하게 될 것이다.

기업에 우리 모두의 미래가 걸려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어딘가 기업에 속해서 일하고 그 대가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국가 세수의 대부분은 기업이 거두는 이익과 직원들에게 주는 급여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처럼 부존자원이 없어 창의성과 성실함을 해외에 팔아 자원을 사와야 하는 나라에서 기업의 생존과 발전은 우리 국민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래서 기업이 잘돼야 한다. 기업이 잘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적합한 리더십이다.

아버지가 회장이면 좋을 것 같지만, 태어나자마자 선택의 여지 없이 글로벌 무한경쟁에 처한 기업을 경영하는 의무를 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행한 일이다. 거대 기업을 경영하는 일은 불세출의 천재에게도 사실 쉽지않은 일이다. 그런 어려움과 불행을 자식에게 떠넘기는 건 부모로서의 도리가 아니라, 절대로 해선 안될 행위인지도 모른다. 소유-경영을 분리하면, 회장님의 자제들은 자유로운 '소유자'로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위한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사회적 지탄과 질투에서도 자유로워진다. 기업이 성장하게 되면 존경을 받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로워 법원과 구치소를 들락거릴 일도 없다. 이것이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와 소유-경영 분리, 전문가에 대한 일임체계를 거부하고 전근대적인 세습체계를 고수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 우리는 휴전선 너머 북쪽의 모습을 보며 너무 잘 알고 있다. 고립된 세습이란 북한과 같은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북한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유-경영 분리를 통해 가문의 진짜 행복을 추구하고, 기업성장을 지속해서 10년간 주가가 60배 오르는 기적이 여러 기업과 가문으로 퍼져나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업 성장이 계속되면 우리나라 경제도 다시 성장하고 우리 모두의 삶도 더 행복해질 것이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경영권 세습을 포기하고, 지주사 중심의 소유 경영 분리체계를 확립하자.
한국형 기업지배구조 선진화를 통해 세계 경제를 선도하자.
그럼 우리나라 모든 재벌기업도 버크셔 해서웨이가 되고, 워런 버핏이 될 수 있다.


강대권 대표는 현재 라이프자산운용을 이끌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산업경제학 전공)를 마쳤고,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스믹(SMIC)'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가치투자 2세대 스타 펀드매니저인 강 대표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거쳐 유경PSG자산운용에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역임했다. 당시 국내 운용사 최연소 CIO다. 지난 2016년, 2020년 국내 주식형 운용사 수익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