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 유독 약하다. 서른을 훌쩍 넘은 나이까지 ‘여름이 없는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었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에 내리쬐는 햇빛을 맞고 있자면 온몸이 가려웠다. 목덜미를 삼키는 열기와 귀를 따갑게 만드는 매미 소리를 참으며, 한반도의 뚜렷한 사계절은 저주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여주 강천섬 유원지를 찾았다. 이른 더위에 특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얼굴에는 자외선 차단제까지 잔뜩 발랐건만, 태양은 자비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땡볕에서 아이와 뛰놀자니 금새 등이 축축해졌다. 아이와는 뛰놀고 동시에 햇볕과는 사투를 벌인지 한참, 설상가상 아이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보이는 놀이터를 가리켰다.
“아빠, 저기 가서 놀자.”
손끝을 따라가 보니 대략 전방 300~400m. 그늘도 없었다. 아이는 분명 얼마 걷지 않아 힘들다며 안아달라 할 것이다. 터지는 한숨을 삼키고 합의를 봤다.
“대신 유모차에 타.”
유모차에 아이를 앉히고 나는, 억겁의 시간을 걸었다. 내 뒷덜미에서 고기를 구워도 익었을 태양이었고, 걷는 길 내내 연신 “아빠”를 외쳐대는 딸아이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간신히 2인분의 체중을 끌고 나는 놀이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땀을 훔친 뒤 유모차를 내려다봤을 때, 딸아이는 잠들어있었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나는, 한숨을 참지 않고 길게 내뱉었다. 그 순간, 바람이 내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얼음장 같은 물로 세수를 해도 그보다 시원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피부가 햇볕에 달궈지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땀을 흘리지 않았다면 그저 지나쳤을 산들바람이었다.
갑자기 호흡이 가벼워진 덕에 바람을 만끽하며 몸을 뒤로 젖히고 주변을 살폈다.
걸어오는 동안 듣지 못했던 새 소리가 들렸고, 흔들리는 나뭇잎이 보였으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스며든 볕뉘가 선명했다. 사방이 녹색인 곳의 여름은 결코 저주가 아니었다. 여름은 새와 바람, 풀벌레의 생명력, 온도/습도와는 무관한 청량함을 품고 있었다.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나는 땀을 씻겨줄 바람도, 시원해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매년 더위와 씨름할 준비만 단단히 해온 나를, 그간 얼마나 많은 바람들이 미지근하게 지나갔을까.
<맑은 날씨에 대한 욕구가 최고점에 달한 때는 말할 것도 없이 2차 세계대전 이후다. 햇빛은 명실상부한 현대성의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웰빙의 형상을 부여하기 위해 각종 소스, 세탁기, 세제, 트랜지스터 광고에 햇빛의 이미지를 끌어들였다. 햇빛은 성공적인 휴가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그것 자체로 국가 발전과 개인 자아실현의 상징이 되었다. 1969년 어떤 글에서는 햇빛은 휴가의 진리이며 “휴가가 진정 휴가이게 해주는 생명력, 즉 재발견되고 소진되어, 모든 면에서 완전히 시련을 견뎌낸 생명력이 되게 해주는 요소다. 햇빛은 당연히 쾌락주의와 연결된다. 더위 속의 노출, 선탠이라는 관능적인 즐거움을 약속하고 허용하며 그것을 통해서 아주 가까이에 있는 에로티시즘을 알린다”고 했다. 더위에 지친 분위기가 깔려 있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등은 태양을 평온의 상징이자 현대성의 기상 풍경으로 만들었다.> - 날씨의 맛(2016) / 알랭 코르뱅 / 책세상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은, 여행에서의 맑은 하늘과 작렬하는 태양에 대한 환상이, 본래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름에 약한 나조차 더위를 피하겠다고 휴가를 떠나면, 먹구름과 비 소식에 적잖이 낙담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이번 여름에도 나는, 흐르는 땀의 불쾌함과 뜨거워진 공기에 가빠지는 호흡을 수없이 만날 예정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따금 불어올 바람을 더 시원하게 맞게 할 선결 조건이라 여기려 한다.
그나저나, 마흔을 앞에 두고 찌는 더위의 새로운 쓰임을 알다니... 역시 여름은 나에게 쥐약이다.
김선욱 레디투다이브 대표
■출판사에서 10년간 마케팅을 하며 <소행성책방>, <교양만두> 등의 채널을 통해 지식교양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현재 출판사 '레디투다이브'의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