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우 농협금융지주 회장(자료=농협금융지주)
지난해 12월 농협금융지주의 인사 시계는 긴박하게 흘렀습니다. 임기 만료를 앞둔 이석준 회장의 연임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채 부사장, 부행장 인사가 먼저 났습니다. CEO가 인사권을 행사하는 게 상식이지만 농협금융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농협중앙회가 100% 지분을 가진 ‘옥상옥’ 조직이다보니 중앙회장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실제로 임기 1년차 강호동 중앙회장은 본인의 권한을 적극 행사했습니다. 이석준 회장을 배제한 채 본인의 의중이 반영된 부사장, 부행장 인사를 먼저 단행한 것이지요. 덕분에 ‘회장-은행장-부행장’ 순이 아닌, ‘부행장-은행장-회장’의 역순 인사가 진행됐습니다.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이 중앙회장의 ‘바지사장’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연출됐습니다.
부사장 부행장 인사가 발표된 그날 밤, 윤석열 대통령의 뜬금없는 비상계엄이 선포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 회장에게 비상계엄은 ‘하늘이 도왔다’고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합장들에게 약속한 공약을 이행하려면 정부와의 원활한 관계가 필수적인데 임기 첫해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계열사인 NH투자증권 CEO에 측근을 앉히려다 이석준 회장과 마찰이 일었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농협금융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많다며 감독권을 적극 행사했습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고심할 무렵 비상계엄 사태가 터진 겁니다. 정권이 교체된다면 더이상 ‘뻣뻣한’ 이석준 회장, ‘매운맛’ 이복현 원장을 상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강 회장은 과감한 베팅을 합니다. 업계의 예상을 깨고 더불어민주당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찬우 전 금감원 수석부원장이 회장으로 전격 발탁된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찬우 신임 회장의 경우 민주당 성향이 태생적으로 강한 사람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맡은 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정통 경제관료라는 평가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이는 박근혜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차관보로 승진해 문재인 정부 초기까지 두 정권에 걸쳐 최장수(2년10개월) 차관보 타이틀을 가진 것에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합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위기 국면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며 경제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다만, 끝이 훈훈하지는 않습니다. 후배가 먼저 차관으로 승진해 용퇴를 결심하고 관복을 벗었습니다.
당시 관가에선 ‘박근혜 정부 당시 승진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며 안타까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본인도 그때의 충격 때문인 지 이후 정치적 중립에서 벗어나는 행보를 합니다. 야인 생활을 거쳐 2020년 경상남도청 경제혁신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김경수 경남지사가 이끄는 직속위원회 자리를 수락한 겁니다. 이를 발판 삼아 그는 문재인 정부 말기 금감원 수석부원장으로 관직에 컴백합니다. 이용우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친형인 점도 야당 인사로 분류되는 한 근거일 순 있습니다.
이찬우 회장은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위기 덕분에 운 좋게 농협금융 회장 자리를 꿰찼습니다. 국가적 화가 개인의 복으로 왔습니다. 물론 실력 없이 운만 작용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능력이 출중한 분이란 데 이견은 크게 없습니다. 다만,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을 대비해야 하듯 이 회장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듯 합니다. 옥상옥 ‘농민대통령’ 강호동 회장의 갈 길이 바쁘고 험난해 보여서입니다.
이찬우 회장(앞줄 왼쪽에서 네번째)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본사에서 열린 '2025년 제1차 농협금융 고객전략협의회 및 시너지추진협의회'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자료=농협금융지주)
강 회장은 지난해 1월 회장 당선 직후 “조합장 여러분께 말씀드린 100대 공약을 꼭 지키겠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국회의원도 선거 공약 10개를 만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 회장은 무려 100개를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해답은 강 회장의 뚝심에 있습니다. 그는 4년마다 진행되는 회장 선거에 세 번 연속 출마해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네 번째 도전에서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10년 넘도록 선거를 치렀으니 공약 100개쯤은 시쳇말로 ‘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직선제로 바뀌고 처음 치러진 지난해 선거에서 8명의 후보 가운데 5명이 50년대생이었습니다. 농업 분야의 고령화 현상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어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반면, 강 회장은 1963년생입니다. 농업 이력이 없는 정병두 후보(59세)를 빼면 60세의 강호동 회장이 후보들 가운데 가장 젊고 개혁적인 인사로 평가됐습니다. 늙고 보수적인 조직에서 젊고 개혁적인 인사가 당선됐으니 농민들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도전에서 마침내 회장직을 거머쥔 강 회장의 감회도 남다를 겁니다. 안팎에서 공약 실천 의지가 기존 회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전언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강 회장의 핵심 공약들이 실행하기 만만치 않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상호금융 특별회계 독립입니다. 농협중앙회는 산하에 약 110조원 규모의 상호금융 특별회계를 보유 중인데, 이는 1100여개 지역조합들의 예치금을 기반으로 합니다. 지역조합들이 예금보험료와 여유자금을 맡기면 중앙회가 운용해 수익금을 정산해 돌려줍니다. 그런데 중앙회의 운용 능력이 신통치 않아서 지역조합들의 정산금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에 중앙회 선거 때마다 상호금융 특별회계 독립법인화가 공약으로 제시됐고, 강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상호금융 독립법인을 제1금융권 수준으로 키워 지역조합들의 수익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한 것이죠.
그런데 농협금융 입장에서는 상호금융 독립법인의 위상이 애매합니다. 은행, 증권, 보험 등의 계열사 자산운용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굳이 별도 법인으로 설립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지인지, 설립한다고 해서 제1금융권 수준의 위상이 저절로 갖춰지는 것인지 의문 투성이 상황인 것이죠. 최악의 경우 농협금융과 독립법인이 지역조합 자금을 두고 경쟁 관계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독립법인 공약은 중앙회 정관 개정 정도가 아니라 농업협동조합법, 금융지주회사법 등 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하지만 강 회장은 공약을 했고, 실천 의지가 강합니다. 중앙회 상호금융이 2023년 대규모(5570억원) 손실로 정산 차질 사태를 빚은 것을 계기로 강 회장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4월 ‘상호금융 비상경영대책위원회’를 꾸렸습니다. 특별회계 수익성 제고, 상호금융 독립화 추진 등 4개의 TF를 가동하며 공약 이행 열의를 불태웠습니다. 다만, 금융당국과의 불화 등 앞서 살펴본 여러 이유로 진척이 있다는 소식은 아직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여건은 작년보다는 우호적인 것 같습니다. 강 회장 입장에서 이찬우 신임 회장은 전임 이석준 회장보다 훨씬 합을 맞추기 편한 사람입니다. 강 회장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지만 학교는 대구 경북대에 진학했습니다. 반대로 이 회장은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지만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서울대로 진학했습니다. 두 회장 모두 경상남·북도가 두루 고향입니다. 이찬우 회장이 김경수 지사와 일할 당시 강 회장은 경상남도 사회적경제위원회, 농업대책위원회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공유할 추억도 많고 접점이 상당합니다. 전임 이석준 회장과 달리 강 회장의 공약 이행에 이찬우 회장이 훨씬 적극적으로 응할 것이란 기대감이 중앙회 내 퍼져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이에 부응하듯 이찬우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시너지 강화’입니다. 그는 취임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농협금융은 농업과 농촌금융이라는 특수성이 있어 이를 이용한다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이 부분에서 지주 전체적인 서비스를 결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중앙회 상호금융을 금융지주가 어떤 형태로든 흡수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지난 2월 경영전략회의에서는 “기존의 방식을 초기화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과 도전정신을 가져달라”며 사고의 틀을 깰 것을 주문했습니다.
지난달 30일 열린 ‘고객전략·시너지추진협의회’에서는 좀 더 구체화된 발언을 내놨습니다.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 전반을 아우르는 11개 자회사뿐만 아니라 경제사업과 전국 농축협을 포함한 범농협 네트워크는 다른 금융회사가 갖지 못하는 농협금융만의 강점이다. 금융 자회사 간의 협업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범농협과 더불어 외부기관과의 협업으로 농협금융의 시너지 영토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농협중앙회의 또 다른 축인 경제지주와의 협업뿐만 아니라 지역조합과의 협력 강화를 시사한 것으로 읽힙니다. 이는 강호동 중앙회장이 강력히 바라마지않는 주문사항입니다. 이찬우 회장 취임을 계기로 강 회장 공약 이행을 위한 내부전열 태세는 어느 정도 갖춰진 듯 보입니다.
다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입니다. 강 회장이 민주당에 베팅한 만큼 우선 4일 탄핵이 가결돼야 합니다. 이후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겨야 공약 이행에 탄력이 붙을 수 있습니다. 진영 내 갈등도 변수입니다. 친박(친박근혜)이 야당인 민주당보다 친이(친이명박)를 더 미워했던 사례로 상기할 때, 친명(친이재명)은 국민의힘보다 친문(친문재인)을 더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찬우 회장은 친명보다는 친문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모로 드라마틱한 정치판, 금융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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