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의 22024년 경영실적 요약. 보통주자본비율(13.51%)과 자사주 매입·소각 규모(5200억원)에 실망한 매물로 주가가 급락했지만 KB금융은 오히려 '밸류업의 품격'을 강조했다.(자료=KB금융)
“한 걸음 더 나아가 품격 있는 밸류업을 보여주었다.”
KB금융그룹이 지난해 실적을 발표하면서 ‘품격’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회장 신년사라면 모를까 ‘숫자’가 뉴스인 실적 관련 보도자료에서는 보기 드문 표현입니다. KB금융은 한 해 성적표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왜 스스로 ‘품격’까지 거론한 걸까요.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사실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리딩금융’ 타이틀을 가진 금융지주로서 굳이 고르지 않아도 될 선택지를 스스로 골랐으니까요.
KB금융은 지난해 말 보통주자본(CET1) 비율이 13.51%라고 밝혔습니다. 4대 금융지주 가운데 최고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시장에서는 실망스러운 반응이 주류였습니다. 지난해 3분기 13.84%에서 3개월 만에 0.33%포인트나 줄어들었거든요. 고작 0.3%포인트 빠진 게 대수냐 여길 수 있겠지만 자기자본이 57조원에 달하는 1등 금융지주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금액으로만 따지면 1조원이 넘는 돈입니다. 0.1%포인트에 약 3500억원이 늘었다 줄었다 합니다.
KB금융은 지난해 10월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지속가능한 밸류업 방안’을 최초 공개했습니다. 핵심 내용은 CET1비율 13%를 초과하는 잉여자본을 주주에게 환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2024년 연말 CET1비율 13%를 넘긴 잉여자본은 2025년 1차 주주환원의 재원으로, 2025년 연중 13.5%를 초과하는 잉여자본은 하반기 자사주·매입 소각 재원으로 각각 활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CET1비율과 연계한 주주환원은 JP모건과 같은 글로벌 선도 금융사의 주주환원 방식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말 CET1비율이 13.51%로 집계됐으니 2025년 주주환원 규모는 13%를 초과한 0.51%포인트(1조7600억원)로 정해졌습니다. KB금융은 이 가운데 연간 현금배당 총액을 감안해 자사주 매입·소각 규모를 5200억원으로 결정했습니다. 시장에서는 KB금융이 지난해 4분기 CET1비율 하락을 적극적으로 방어해 자사주 매입·소각 규모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모 증권사는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5200억원으로 정해졌고 이에 주식시장에서는 실망 매물이 쏟아졌습니다.
눈여겨볼 지점은 KB금융이 시장의 기대를 충족시키려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CET1비율은 보통주자본에서 위험가중자산(RWA)을 나눈 값입니다. 이익잉여금이 늘어나 분자가 커지거나 분모인 RWA가 줄어들면 증가하게 됩니다. 이익을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경영진이 CET1비율을 입맛에 맞게 조정하고 싶을 때는 보통 RWA를 많이 건드립니다. 이른바 자산 리밸런싱입니다.
일사불란한 은행지주 조직체계에서 최고경영자(CEO)가 뚜렷한 목적과 의지를 갖고 목표 숫자를 제시하면 전략과 재무 파트에서는 어떻게든 솔루션을 찾아내 계열사와 영업 현장에 관련 행동 지침을 전파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KB금융 양종희 회장은 주가 하락을 감수하면서도 무리한 숫자를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최대 수익’보다 ‘적정 수익’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서 읽힙니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KB국민은행의 경우 순이익이 전년 대비 오히려 소폭(100억원) 감소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룹 전체적으로는 순이익이 전년 대비 10.5%(4834억원) 증가하며 ‘5조 클럽’에 진입했습니다. 증권, 손보, 카드, 생보 등 다른 계열사들의 이익이 모두 크게 개선된 영향입니다. 덕분에 비은행 부문 수익 기여도는 2023년 33%에서 지난해 40%로 크게 확대됐습니다.
은행의 순익이 감소한 것도 수익창출 능력이 약화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순이자이익이 10조원을 돌파하며 전년 대비 3.6%(3538억원)나 증가했으니까요. 오히려 명예퇴직 직군을 확장하는 등 비용을 의도적으로 늘려 이익을 감소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고금리 환경의 장기화로 은행의 ‘이자 장사’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비등해진 상황에서 ‘최대 수익’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것은 CEO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주환원 강화를 부르짖는 ‘밸류업 시대’에 핵심 수익원인 이자이익을 후퇴시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밸류업 모범생’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도 ‘이자 장사’ 비판을 일정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수준의 이익, 다른 금융지주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경쟁력을 부각시킬 수 있는 실적, ‘리딩금융’ 타이틀에 걸맞은 진정한 의미의 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위해 KB금융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고민의 결과는 CET1 13.51%와 비은행 수익기여도 40%로 각각 발현됐습니다. 세 번째 고민의 결과물은 ‘사회적 가치 밸류업’입니다. 사실 주목도가 낮았지만 이번 실적발표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KB금융이 ‘품격’까지 거론할 수 있게 된 자부심의 원천이니까요.
이미 예고는 됐습니다. ‘밸류업’ 방안 발표 당시 KB금융은 “단순히 총주주환원율 목표를 제시하는 경쟁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기업가치 증대를 위한 방안이 주주환원과 연결되어야 진정한 주주가치 제고를 실현할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밸류업 공시를 준비했다”고 밝혔습니다. 단순히 숫자가 아닌, 본질적인 기업가치 증대 방안을 찾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놓은 결과물이 ‘사회적 가치 밸류업’입니다.
KB금융은 지난해 사회공헌 전략체계 개편을 완료했습니다. 고금리로 서민들이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이익이 많이 나는 회사이다 보니 사회 각계각층에서 지원 요청이 쇄도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백화점식, 나열식 지원이 되기 십상입니다. 이에 KB금융은 사회공헌에 최대한 진심을 기울이되, 나름의 전략과 체계를 갖춰 실효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난해 그 작업이 완료된 것이죠. 포커스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돌봄’과 ‘상생’에 맞췄습니다.
KB금융은 지난해 8월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지방자치단체와 협약을 맺고 소상공인의 출산 장려와 경영 부담 완화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협업해 3조원 규모의 정책자금 대출을 은행 및 기관 방문 없이 편리하게 신청할 수 있도록 ‘비대면 원스톱 정책자금 서비스’도 도입했습니다. KB금융이 발간한 ‘사회적 가치 성과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창출된 사회적 가치는 환경 3027억원, 사회 2조3814억원, 기타 3조143억원 등 총 5조6984억원에 달했습니다. 이는 2022년(3조5485억원)에 비해 60.6%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 순이익을 넘어서는 규모입니다. KB금융은 올해에도 은행권 맞춤형 소상공인 금융지원 계획에 적극 동참하는 등 ‘돌봄’과 ‘상생’에 진심을 전한다는 계획입니다.
KB금융의 행보를 보면서 ‘밸류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번역하면 ‘기업가치 제고’인데 기업가치는 어떻게 고양될 수 있는 것일까요. 평범한 사원에서 출발해 제7대 회장직까지 오른 양종희 회장은 ‘국민과 함께 성장하는 금융’에서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는 2023년 11월 취임사에서 “KB의 성장은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하고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소신을 밝혔습니다. 사회의 패러다임이 ‘경쟁과 생존’에서 ‘상생과 공존’으로 바뀐 만큼 ‘사회-고객-직원-주주와 함께 성장하며 기업가치를 높여나가겠다’는 포부였습니다.
당시는 정부의 ‘상생금융’ 압박이 극심하던 때여서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후 보여준 행보에서 진심이 묻어났습니다. “재무적 가치뿐만 아니라 상생을 추구하는 기업만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었음을 ‘5조7000억원의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며 보여줬습니다. 다시 뒤져보니 ‘품격’이란 단어도 이미 취임사에서 강조됐더군요. 젊은 시절 자신의 영업 현장 경험을 반추하며 “고객이 느끼는 최고의 경험은 금융인의 품격 있는 영업에서 시작된다”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양 회장에게 밸류업은 ‘사회-고객-직원-주주가 함께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중에서도 ‘사회(상생)’가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CEO가 수익 극대화를 위해 방방 뛰는 회사에서 ‘품격’이 비집고 설 자리는 없습니다. 기업의 품격은 CEO의 품격과 일맥상통합니다. KB금융이 여러 방면에서 ‘선순환 구조’에 진입했다는 느낌입니다. 권선주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경영진이 진심으로 머리를 맞대고 올바른 경영을 숙의한 결과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KB금융의 품격 있는 경영이 부디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양종희 KB금융그룹 회장은 2023년 취임식에서 '국민과 함께 성장하는 금융'을 강조했다.(자료=KB금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