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HBM4 메모리. (사진=SK하이닉스)
올해 반도체 업종은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축으로 한 '반도체 슈퍼사이클' 시대를 맞이했다. AI 데이터센터와 고성능 연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트럼프 관세정책 등 대외적 불확실성을 딛고 반등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올 3분기 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은 직전 분기 대비 14.5% 증가한 2163억달러(약 318조4370억원)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다. 과거 PC·스마트폰 수요에 의존하던 것과 달리, AI 데이터센터·자율주행·클라우드 등 AI 수요에 맞춰 '슈퍼사이클'을 맞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시대가 개막되면서 반도체 업종의 키워드는 HBM, 그리고 엔비디아와의 협력이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다. SK하이닉스는 상반기부터 엔비디아에 HBM3E를 공급하며 'AI 메모리 대장주'로 부상했다. 삼성전자는 상반기까지 HBM 인증 지연과 파운드리 부진으로 고전했지만 3분기 HBM3E 제품 검증을 통과, 엔비디아 공급망 합류를 기정사실화하며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는 실적 호조로 이어졌다. 일찌감치 시장 지배력을 굳힌 SK하이닉스는 매분기 실적 최대치를 경신하며 3분기 창립 이래 최초로 영업익 10조원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매출 역시 24조4500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새로 썼다.
고전하던 삼성전자는 올 3분기 매출 86조1000억 원, 영업이익 12조2000억원을 벌어들이며 재도약에 나섰다. 특히 반도체 부문에서 매출 33조1000억원, 영업이익 7조원을 기록하며 메모리 왕좌 1위를 탈환했다. 테슬라와 23조 원에 달하는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등 일회성 비용이 감소, 라인 가동률이 개선되면서 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는 평가다.
하반기부터는 HBM4를 둘러싼 기술 경쟁이 한층 심화됐다. 앞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차세대 AI 플랫폼 '루빈'의 출시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예상했고, 양사 모두 본격적인 수주경쟁에 앞서 HBM4의 기술력·양산 체제 구축에 돌입했다. '루빈'은 기존 '블랙웰'의 차기 아키텍처로 HBM4가 탑재되는 첫 번째 엔비디아 GPU다.
SK하이닉스는 1b 공정으로 HMB4 초기 안정성과 개발 속도를 확보하는 전략을, 삼성전자는 더 진보된 1c 공정으로 미세화·전력 효율을 끌어올리는 대신 수율과 한층 높은 난이도를 감수하는 방향을 택했다. HBM4는 수많은 세부 변수가 적용되는 제품인만큼 성패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SK하이닉스가 오는 2026년 16단 HBM4 출시를 공언하며 먼저 앞서 나가는 모양새다.
다만 슈퍼사이클의 이면에서는 HBM 투자 확대에 따른 범용 D램 품귀현상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HBM은 기본적으로 D램 다이를 적층해 만들고, 따라서 HBM 투자 확대가 범용 D램 생산 여력 축소로 이어지는 구조다. 특히 수익성만 놓고 보면면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 HBM에 비해 D램이 훨씬 유리한 입지에 놓인 상황이다.
이에 양사 모두 기술개발과 함께 생산량을 늘리는 투트랙 전략을 세웠다. SK하이닉스는 용인클러스터의 투자규모를 600조원으로 확대했으며, 청주에도 향후 4년간 42조원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삼성전자는 평택캠퍼스에 건설 중인 4공장(P4)의 조기 가동 추진에 이어 지난달 5공장(P5)의 골조공사 추진을 결정했다.
지정학적 변수를 고려한 체제도 준비 중이다. 특히 내년에도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 우선 기조, 대중 경제책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반도체·AI 공급망은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양사 모두 미국을 중심으로 투자를 늘릴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 팹(공장)의 양산 체제를 갖추고 오는 2027년부터 테일러 팹에서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 안정적인 초기 수율을 위해 4㎚(나노미터) 공정을 우선 적용한 뒤, 국내에서 수율을 끌어올리고 있는 2나노 공정의 노하우를 순차적으로 이식한다는 구상이다.
SK하이닉스는 최근 글로벌 시장을 정조준한 조직개편을 마쳤다. 미주 지역에 HBM 고객사 전담 기술 조직을 신설하고, HBM 패키징 수율, 품질 전담 조직이 개발부터 양산, 품질 과정을 아우르는 HBM 특화 조직 체계를 갖췄다.
동시에 미국 인디애나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 구축을 본격화하며 '글로벌 인프라' 조직을 신설했다. 이를 통해 글로벌 생산 체계의 일관성을 강화하고, AI 메모리 수요 확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증권가에서는 내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의 합계가 2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삼성전자의 내년 영업이익을 116조4480억원으로 전망했고, 이 중 DS부문 영업이익을 94조6250억원으로 예측했다. 노무라증권은 같은 기간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99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