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1(사진=하이어뮤직)
[뷰어스=이건형 기자] “욕이나 성(性), 향락적인 것들을 가사에 쓰지 않으려 의식하고 노력해요. 스스로에 준 숙제죠.”
순진하진 않지만 순수했다. 진짜 하고 싶은 꿈을 위해 과감히 손에 쥔 것들을 놓을 줄 아는 낭만자다. 아직 대중에겐 낯선 래퍼 pH-1(피에이치원)은 한방보단 천천히 스며드는 길을 택했다.
박재범이 설립한 힙합 레이블 하이어뮤직 소속인 pH-1은 지난해 미국에서 건너왔다. 본래 웹개발자였던 그는 ‘후회 없는 삶’ 그 한 가지를 위해 한국에 왔다. 웹개발자를 하기 전 치대를 준비했을 만큼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내려놓을 만큼 그에게 음악은 인생의 1순위다.
“미국에서 살았을 때는 음악을 취미로 했죠. 원래 치대를 가려고 준비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웹개발 회사를 다녔거든요.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어요. 바로 음악에 대한 꿈이었죠. 그래서 ‘한국에서 시도해보자’는 용기를 품게 됐어요. 아예 시도조차 안 해보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아서 한국을 왔어요.”
인복이 좋았다는 말을 꺼낸 pH-1은 한국에 오자마자 귀인을 만난다. 바로 하이어뮤직 사장인 박재범이다. 지난해 음악하는 친구 따라 잠시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박재범뿐 아니라 타블로, 테디 등 국내 유명 래퍼들과 인연을 쌓았다. 그는 “지난해 6월에 한국에 왔다가 3개월 후에 박재범과 계약 얘기를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난 인복이 좋았던 것 같다. 정말 타이밍 좋게 감사한 사람을 만나서 빠르게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인복이 그의 실력의 전부일까. pH-1의 노래는 국내 래퍼들과 차별되는 특별함이 있다. 아마 박재범, 타블로, 테디가 그를 주목했던 것도 이 때문일 지도 모른다. 국내 랩 소재의 대부분은 욕, 돈, 성(性) 등 자극적인 것들이 주가 됐다. 하지만 pH-1은 다르다. 욕 하나 없이 빼곡히 채워진 가사는 듣고 나면 기분 좋은 설렘을 안긴다.
“다르고 싶고 구별되고 싶어요. 한국은 워낙 유행에 민감하잖아요. 또 유행하면 다들 몰리니까. 전 종교적인 것도 있고 추구하는 음악이 유행을 따르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현재 한국에선 돈 이야기 여자 이야기가 주고, 미국에선 마약 이야기를 가사에 많이 쓰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자극적이고 신나게 들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전 덜 신날지언정 나만의 색깔이 좀 더 선하게 들렸으면 좋겠어요. 가족한테 들려줘도 부끄럽지 않을 노래와 가사를 쓰는 래퍼이고 싶어요.”
pH-1(사진=하이어뮤직)
하지만 때론 이런 신념이 pH-1에게 큰 갈등을 안긴다. 유행을 따르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 그는 “작업 할 때 수시로 그런 생각이 확확 들어올 때가 많다. 옆의 동료들은 대중적인 색깔을 갖고 있는 음악을 하지 않냐. 나도 그렇게 만들어야하는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진하고 자극적인 주제를 쓰는 게 정답일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재정비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다보니 동료에게 ‘속삭임 래퍼’라고 놀림을 받는다고 한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하이어뮤직에서 그는 조금 유니크한 존재다. 신실한 크리스천인 만큼 선한 행동과 말투가 습관화 된 그다. 회사 내에서 ‘선한 영향력’을 담당하기도 한다고. 욕, 술 등 향락적인 것들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음악에서도 삶의 분위기가 투영된다. pH-1의 음악을 다 듣고 나면 드는 생각은 ‘순수’다.
pH-1은 18일 생애 첫 EP앨범 ‘The Island Kid’을 발매했다. 이 수록곡 순서는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트랙 순서에 맞춰 하루의 일과를 표현한 것이다. 1번 트랙 ‘Christ’를 시작으로, 넘치는 에너지와 감사한 마음이 담긴 낮의 감정을 표현한 타이틀곡 ‘Donut (feat. 박재범)’, 저녁시간 이성과의 설레는 신경전을 다룬 ‘Game Night’, 한국시각으로 늦은 밤 뉴욕에 계신 부모님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는 내용의 ‘Cuckoo’, 새벽시간 머리에 가득한 생각들을 곡으로 옮긴 ‘Escobar(feat.오왼 오바도즈)’, 잠든 후 꿈속에서 2015년을 돌이켜보며 현재를 바라보는 의미의 ‘’15(feat.지소울)’까지 하루 24시간을 고스란히 담아 듣는 재미를 더했다.
“이번 EP에 노래를 많이 했어요. 원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색소폰도 불고 기타도 켜고 이거 저거 다했어요.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종착하게 된 게 힙합이었죠. 음악을 만들 때 나만의 색을 넣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노래같이 만들어진 곡들이 많죠. 그게 나의 진정한 색깔인 것 같아요. 파워풀하게 쏟아내는 랩이 아니라 듣기 편한 스타일이죠. 그래서 회사에서 속삭임 래퍼라고 놀림 받기도 해요.”
그럼에도 pH-1은 하이어뮤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처럼 그 역시 회사 내에서 다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 다름은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결국 유행은 돌고 돈다. 지금처럼 자신의 것을 온전히 하다보면 그 역시 사랑받는 래퍼가 돼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