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상 캡처)
[뷰어스=문서영 기자] 어린 시절 가장 싫어했던 장르가 위인전이었다. 천편일률적인 순서와 비슷비슷한 인생의 나열이 어린 마음에도 지루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조금 더 자라 청소년기에 읽은 좀 더 두꺼운 위인전은 같은 이들의 생애임에도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인이 되어 읽는 이 시대 위인들의 자서전, 평전의 깊이는 더욱 남다르다.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요약한 위인전은 일찌감치 귀감이 되는 행동과 생각을 배우고 삶의 지표로 삼으라는 뜻일 터다. 그러나 진실로 그들의 생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배우는 때는 세상 좀 살아본, 성인일 때가 아닐까. 직업적으로, 인생으로 귀감이 되는 이들의 자서전, 평전을 소개한다.
(사진=관련 책표지)
■ 묵묵히 걸은 그 길에 남은 건
‘닥터 노먼 베쑨’(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 실천문학사)은 휴머니스트 의사에 대한 이야기다. 결핵의 수술적 치료법 개발 등으로 의학발전에 기여한 탁월한 흉부외과의사일 뿐 아니라, 스페인의 반파쇼 투쟁부터 중국의 신민주주의혁명과 항일투쟁 등에서 전시분야 의료의 개척자로서 활동한 노먼 베쑨의 행적을 그가 남긴 일기와 회고담, 편지 등을 활용해 전한다. 캐나다 사람으로 태어나 중국인 백구은(白求恩: 바이츄언)으로 죽은 노먼 베쑨은 사람과 사회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한 의사였다. 의사로 시작해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된 사람 중에는 수술실을 벗어나 거리에서 정치운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지만 노먼 베쑨은 생애 줄곧 스스로 의사라는 자각을 놓치지 않았으며 사람과 사회를 고치는 방법 또한 자신의 메스를 통해 찾으려 했다. 그는 사회적 부조리를 의료활동 중 깨달았고 이를 통해 차가운 이성으로 자신의 정치색을 정했으며, 그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부와 명예를 마다한 채 이국의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다 생을 마감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알베르트 슈바이처 | 문예출판사)은 교수들이 많이 추천하는 책으로도 유명하다. 20세기 정신적 스승 슈바이처의 유년시절부터 그의 생애 전반을 아우르는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과연 당연한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21세에 중대한 결심을 한다.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전공하고, 그 후부터는 인류에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철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부 교수이자 성 니콜라이 교회 목사로 봉직하다가 29세에 아프리카 선교 봉사 인력이 부족하다는 기사를 보고 아프리카로 갈 것을 결심한다. 음악학자, 철학자로서의 눈부신 명성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의 원시림 속에서 의사의 길을 택한 그의 생애는 ‘생에 대한 외경’이라는 사상으로 가득하다. 개방적이고 허식과 편견이 없는 다정다감한 인간, 과거의 인물이 아닌 약동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슈바이처의 모습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사진=관련 책표지)
■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헬렌 켈러 | 산해)은 어린 시절 위인전과는 다른 분위기다. 삶의 소중함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미국의 맹농아 저술가이며 사회사업가였던 헬렌 켈러가 22세에 쓴 아름다운 자서전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50대에 이른 헬렌 켈러가 자신의 눈이 뜨여 3일간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상황을 가정하고 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완역한 책이다. 헬렌 켈러는 잘 알려진 것처럼 태어난 지 19개월 되었을 때 심한 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하다 간신히 살아났고 그 여파로 청각과 시각을 잃었다. 그의 부모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권유로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아학교에서 앤 설리번을 헬렌의 가정교사로 모셔온다. 앤 설리번과 헬렌이 함께한 초기의 이야기, 다시 말해 헬렌이 정신적, 지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룬 시기의 이야기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 담겨 있다. 여기에 53세에 쓴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 더해졌다. 그는 시력과 청력을 잃고 살아온 긴 세월 동안 간절히 보고 싶어하고 또 하고 싶어했던 일을 꼼꼼한 묘사와 수려한 말솜씨로 들려주면서, 사흘만이라도 빛을 보게 해준 하느님께 감사하며 다시 영원한 어둠으로 돌아가겠다고 고백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 청아출판사)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프랭클 박사의 자전적 체험수기다. 그는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헐벗은 자신의 생명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생히 체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상실하도록 만드는 강제수용소.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뿐이다. 프랭클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과 무감각의 복잡한 흐름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특히 저자는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한다. 이 책은 저자가 가족의 죽음과 굶주림, 혹독한 추위와 핍박 속에서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로고테라피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아, 자신의 삶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안내한다.
(사진=관련 책표지)
■ 자서전의 품격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 ‘인생은 뜨겁게’(버트런드 러셀 | 사회평론)는 자서전의 전범으로 평가받는다. 저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저술가이며,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문필가이기도 하다. 1872년 영국 웨일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공교육을 거부한 할머니의 교육 방침에 따라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수학과 도덕과학을 전공했다. 사상가, 철학자, 수학자로서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던 러셀은 30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모해간다. 그는 전쟁 중인 1916년 징병 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납부를 거부하며 대학 강의권을 박탈당한다. 2년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핵무기로 인한 인류의 파멸을 막고자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조직했고, 아흔의 나이에도 시민 불복종 운동에 앞장섰다. 또 러셀은 아인슈타인, T. S. 엘리엇, 디킨슨, 케인스, 화이트헤드, 조지프 콘래드, 비트겐슈타인 등 한 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20세기 지성사에서 그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수학과 철학, 사회학, 교육, 종교, 정치, 과학 분야에 걸친 98년 그의 인생과 지식이 총망라됐다.
장 지글러의 ‘인간의 길을 가다’(장 지글러 | 갈라파고스)는 실천적 사회학자의 삶을 담아낸 책이다. 기아 문제에 대한 경종을 울린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대중에 잘 알려진 장 지글러는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북한 등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빈 인물이다. 그는 스위스 은행이 세계의 독재자, 범죄자들의 은닉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살해 위협을 받고, 소송을 당해 파산하기도 했다. ‘인간의 길을 가다’는 이처럼 평생을 불의에 맞서 살아왔던 한 실천적 지식인의 지적 원동력과 지적 무기가 무엇인지 추적해가는 인문학적 자서전이다. 장 지글러는 볼테르, 루소, 마르크스, 그람시 등 자신의 행보에 지적 토양이 된 사상가들의 시대정신을 더듬어가며 불평등의 기원, 학문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인간의 소외와 국가의 역할, 국민 개념의 탄생 과정 등을 고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