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스톰픽쳐스코리아)
[뷰어스=김동민 기자] 사랑과 마술은 묘하게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입증하는 것도 불거능하다. 분명 텅 비어있다가 어느 순간 ‘짠’ 하고 나타나거나, 반대로 분명히 존재하던 게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사랑 얘기와 마술 쇼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로 남을 미스터리로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 셈이다. 영화 ‘바람의 색’에 등장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 세계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고, 그들의 얼굴을 한 또 다른 남녀 역시 서로 사랑한다.
‘바람의 색’은 백수 료(후루카와 유우키)와 그를 떠난 연인 유리(후지이 타케미)의 이야기다. 동시에 천재 마술사 류와 그의 연인 아야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연인 유리가 남긴 단서들을 통해 그의 자취를 찾아나선 료가 그와 꼭 닮은 아야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유리를 잃은 료, 그리고 류를 잃은 아야를 중심에 둔 서사는 이들 각자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을 큰 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로맨스와 판타지를 아우르며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사랑을 그린다.
‘바람의 색’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모티프는 바로 ‘도플갱어’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훗카이도에 살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유리는 배우 후지이 타케미의 1인 2역을 통해 아야가 되어 나타난다. 우연히 TV에서 류의 존재를 알게 된 료 역시 그를 통해 마술사의 길을 걷게 된다. ‘도플갱어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는 설정대로, 이들은 각각 둘 다 존재하지만 결코 함께 존재하지는 못한다. 떠난 연인의 도플갱어를 통해 자신의 도플갱어와 마주하는 이들의 관계도는 사뭇 깊은 철학적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사진=스톰픽쳐스코리아)
‘엽기적인 그녀’에서 ‘클래식’, ‘시간이탈자’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기억, 존재를 화두로 내걸어 온 곽재용 감독의 로맨스 화법은 이번 영화에서도 유효하다. 여기에 마술을 주요 소재로 한 만큼 ‘바람의 색’은 강렬한 드라마는 물론 적절한 눈요기, 소소한 재미까지 일궈내는 데에 성공한다. 특히 극 중 각자의 연인을 사라지고 나타나게 하는 류와 료의 마술 공연은 평행우주 너머에 존재하는 듯한 이들의 구도와 맞물리면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자신과 상대의 정체성에 대해 느끼는 두 사람의 혼란을 뛰어넘어 이들 간의 사랑에 방점을 찍는 후반부 전개는 그런 점에서 큰 울림을 남긴다.
다만 짧은 호흡으로 신파를 남발하는 듯한 ‘바람의 색’의 만듦새는 다소 아쉽다.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떠나는 인물들의 여정과 영화 후반부 드러나는 떠난 이의 진심은 감동적이만, 단지 ‘갑자기 사라졌다’는 설정만으로 설명되는 주인공들의 애틋한 감정은 좀처럼 공감하기 어렵다. 마술의 트릭처럼 빼곡하게 담긴 영화적 장치들에는 감독의 남다른 애정과 그대로 담겨 있지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기승전결을 희미하게 하면서 드라마를 상당 부분 방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의 색’은 로맨스 장르가 거의 멸종한 한국 영화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감독 특유의 영상미는 ‘바람의 색’이란 제목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로맨스의 색채를 아름다운 비주얼로 담아냈다. 특히 두 주인공이 훗카이도 아바시리 바다 위 쇄빙선에서 유빙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 압도적이다.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더없이 강렬한 사랑, 로맨스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4월 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