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감각 쾌락반응을 일컫는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트리거(Trigger, 심리적 자극)를 통해 ASMR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팟캐스트, 유튜브 등 뉴미디어를 넘어 이젠 대중매체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처럼 ASMR이 각종 콘텐츠에서 각광받는 소재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이 ASMR 콘텐츠를 소비하는 심리와 효과를 살펴본다. -편집자주-
(사진=Pixabay)
[뷰어스=노윤정 기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영상을 사람들이 보고 있다. 그것도 꽤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충족감을 주는 키네틱 샌드 뜨기 놀이’(Satisfying Kinetic Sand Scooping)라는 제목의 영상이 게시돼 있다. 6분이 채 되지 않는 플레이 시간 동안 영상은 그저 모래 장난감의 일종인 키네틱 샌드를 국자로 뜨고 채우길 반복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영상은 오로지 모래를 뜨고 채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담는 데 집중한다. 모래 특유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이 단순한 구성의 영상은 현재 조회수 4600만 회를 넘어섰다. 이 영상의 부제는 ‘ASMR 사운드’(ASMR Sounds)다.
ASMR은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자로 직역하면 자율감각 쾌락반응이다. 2007년 미국의 스테디헬스(Steady Health)라는 사이트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개념이며 2010년 제니퍼 알렌(Jennifer Allen)이라는 인물이 ASMR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했다. 트리거(Trigger)가 되는 특정 자극을 통해 기분 좋게 소름 돋는 느낌을 뜻하는 팅글(Tingle)을 느끼는 현상을 바로 ASMR이라고 한다. 아직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개념이 정립된 용어가 아니기에 ‘백색소음’ 등과 혼용되기도 하나, KIST 바이오닉스연구단 김래현 박사에 따르면 ASMR은 엄밀히 말해 ‘나른한 쾌감’을 느끼는 현상을 뜻한다.
최근 이런 ASMR을 활용한 콘텐츠가 증가하고 있다. ASMR 콘텐츠를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곳은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13년 유튜버 미니유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제작·소비되기 시작했고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도 인기 있는 콘텐츠로 떠올랐다. 콘텐츠 플랫폼 업체 피키캐스트의 간판 예능 ‘엄마가 잠든 후에’는 ASMR과 오락적 요소가 결합된 대표 사례다. 출연진은 소음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는 등의 미션을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바스락거리며 음식 포장을 뜯는 소리, 음식을 오물거리는 소리 등이 반복적으로 담긴다. 또한 포털사이트 네이버 V라이브 시리즈 중 하나인 눕방 라이브에는 출연진이 직접 ASMR을 유도하는 소리를 만드는 코너가 있다. 해당 코너에는 스포이드로 물을 떨어트리는 소리, 베개를 토닥거리는 소리, 갓 딴 탄산음료를 얼음이 담긴 잔에 따르는 소리, 나물을 무치는 소리 등 ‘눕방’(누워서 하는 방송)이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기분 좋은 소리들이 담긴다.
(사진=SensorAdi ASMR 유튜브 영상, 네이버 V라이브 화면, 이니스프리 '나는 한란을 씁니다' 60s ver., tvN 숲속의 작은 집 방송화면, 피키캐스트 '엄마가 잠든 후에')
■ 이것도 ASMR이라고?
ASMR 활용 사례는 뉴미디어를 넘어 기존 대중매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팅 사운드(Eating Sound)를 강조하는 먹방(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이 대표적인데, 현재 방영 중인 tvN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3: 비긴즈’에는 주인공들이 별다른 대사 없이 음식을 먹기만 하는 모습이 수 분간 담긴다.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를 표방했던 tvN 10부작 예능 프로그램 ‘숲속의 작은 집’은 ASMR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이는 동시에 출연진 소지섭과 박신혜가 음식을 만들고 먹는 소리, 마른 장작을 패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새소리 등으로 프로그램을 채우며 대놓고 ASMR을 유도한다. 이에 앞서 12부작으로 방영된 채널A 예능 프로그램 ‘우주를 줄게’ 역시 다른 효과음을 최소화하고 뮤지션들의 노래와 함께 낙엽 밟는 소리, 빗소리 등 심리적 안정감과 기분 좋은 쾌감을 이끌어내는 소리를 담아 ASMR을 프로그램 전면에 내세웠다.
ASMR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바로 ASMR을 활용한 광고다. 광고는 짧은 시간 안에 광고 대상을 알리고 소비를 유도해야 한다. 더욱이 요즘처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광고는 눈에 띄기 위해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해왔다. 그런 광고업계까지 ASMR에 눈을 돌린 것이다. 홍진경과 소녀시대 윤아를 모델로 내세운 코스메틱 브랜드 이니스프리의 ‘나는 한란을 씁니다’ 시리즈 광고(2017)는 소리의 매력을 극대화한 광고다. 해당 광고는 연필의 서걱거리는 소리, 창 밖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 소리, 성에 낀 창문에 손가락으로 낙서 하는 소리, 화장품 바르는 소리 등으로 채워져 있다. 더페이스샵은 지난해 ASMR 소리 퀴즈 콘셉트를 B급 유머 코드로 풀어낸 ‘닥터벨머 민감남녀 연구소’ 광고를 제작해 바이럴마케팅을 진행했다. 식품 기업 풀무원이 제작한 ‘김풍이 들려주는 육개장칼국수 ASMR…. 라면 먹고 갈래?’ 광고는 유튜브가 2017년 1분기 시청 지표를 종합적으로 집계해 선정한 국내 광고 톱10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해당 광고는 라면 봉지 소리, 파 써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면발 흡입하는 소리, 국물 마시는 소리 등 모든 소리를 극대화시켜 청각을 중점적으로 자극한다. 최근에는 제약회사 경동제약이 광고 모델 아이유와 ASMR을 유도하는 콘셉트로 진통제 ‘그날엔’ 광고를 제작했다.
(사진=Pixabay)
■ ASMR 찾는 이유? 피로·불안감이 원인
이처럼 ASMR 콘텐츠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는 추세는 저자극 콘텐츠의 부상과 맞닿아 있다. 이는 곧 현대인들이 그만큼 많은 스트레스와 자극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중매체와 SNS에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표현들이 넘쳐나고 일상 속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런데 제대로 쉴 수 있는 물리적 시간도 부족하다. 2016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일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 41분으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지난 4월 진행한 취업 포털사이트 사람인 조사 결과(직장인 773명 대상)에서도 일평균 6시간 잔다고 응답한 사람이 42.3%로 가장 많았다. 7시간 잔다고 응답한 비율(24%)과 5시간 잔다고 응답한 비율(21.8%)이 그 뒤를 이었다. OECD 회원국 국민의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 22분이다.
2015년 방송된 KBS2 ‘추적 60분’의 ‘탈출구 없는 피로사회-번아웃 증후군’ 편에서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우리나라 일반 직장인들의 70% 이상이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어떤 일에 의욕적으로 몰두하다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여 피로감과 무기력증, 불안감, 의욕 상실 등을 호소하는 증상을 말한다. 이는 비단 직장인뿐만 아니다. 지난해 취업 포털사이트 잡코리아가 취업준비생 1098명을 대상으로 번아웃 증후군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취업준비생의 87.3%가 취업 준비를 하면서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또한 ‘트렌드 코리아 2018’(김난도 외 | 미래의창)에서는 현대 사회를 ‘성과주의 사회’라고 말하며 현대인들이 “효율과 성취를 위해 자기 자신을 착취할 것을 내면화함으로써 삶에서 소진을 일상화”한다고 분석했다. 또한 최근 몇 년 사이 이렇게 자신을 소진하면서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현대인들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치유가 화두가 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ASMR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많은 현상들이 피로증에서 기인한다. 사람은 결국 뇌가 작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콘텐츠 소비도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평론가는 “정보에 대한 피로증 때문에 ASMR 콘텐츠가 많이 소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너무 피곤한 거다. 정보도 너무 많고 할 일도 많지 않나. 그러다 보니 어떤 정보 전달도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는 콘텐츠에 대한 소비 동기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며 “정보 과잉 시대 아닌가. 관계에 대한 피로증도 있고.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뇌에서 처리해야 할 정보가 최대한 없는 콘텐츠에 대한 소비 심리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유럽에는 몇 시간 동안 기차의 맨 앞자리에서 찍은 풍경만을 방송한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런 것도 일종의 시각적 ASMR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송후림 교수는 뉴미디어의 발달이 ASMR 콘텐츠의 유행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실제 ASMR을 활용한 콘텐츠는 SNS 등을 중심으로 발달·전파돼 온 터. 송 교수는 “현재 ASMR 콘텐츠가 유튜브에 많이 올라와 있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유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