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코탑미디어
배우는 선택받는 영역이다. 선택하는 위치에 있는 배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선택을 받는다. 그러면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가 생긴다. 남규리는 오랜 기다림을 견뎌낸 배우다. 2013년 JTBC ‘무정도시’ 이후로 수 년간 자신의 내면을 보여줄 작품을 기다렸고, 2016년 SBS ‘그래 그런거야’ 이후 다시 2년을 기다렸다. 그래서인지 남규리는 작품 또는 캐릭터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기다림의 결과는 다소 예쁘게 포장된 필모그래피로 보상받았다. 가녀린 몸매와 바비인형과 같은 얼굴임에도, 작품 속 남규리의 얼굴은 매번 다르다. 천방지축이면서도 내면에 아픔이 있었던 밝은 윤수민(‘무정도시’), 웨이브가 진한 헤어로 연예인이 되고 싶지만, 매번 고배를 마셨던 이나영(‘그래 그런거야’),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환각에 사로잡혀 광기를 뿜어냈던 신지민(‘데자뷰’), 로봇처럼 감정이 없었던 형사 전수영(‘붉은 달 푸른 해’), 그리고 화려함 뒤에 냉철한 비수를 숨기고 있었던 미키(‘이몽’)까지, 남규리의 얼굴은 늘 달랐다.
“그렇게 가기까지 어마어마한 잠 못 이룸이 있었어요. 선택을 받는 입장에선 늘 초조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내는데, 제 이상향은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필모그래피예요. 제가 원하는 방향이 그렇다보니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피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다른 얼굴, 다른 모습,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던 욕망이 컸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생겨난 필모그래피를 두고 남규리는 운명이라고 했다.
“운명인 것 같아요. 제가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 때, 그 감정을 알아야하는 작품이 오기도 했죠. 배우라는 직업을 하면서 저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 같고, 피할 수 없는 숙명 같기도 해요. 반 미신 같긴 한데 아예 그런 게 없다고 배제하긴 힘들 것 같아요. 내공이란 나를 다스릴 줄 아는 것 같아요. 그 내공이 연기로 표출 하는 게 배우고. 그 내공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 저는 많이 기다리는 편인 것 같아요.”
사진제공=코탑미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만난 작품과 캐릭터 앞에서 남규리는 조금도 교만할 수 없었다. 크든 작든 간에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끝까지 몰아세우면서 연기를 해왔던 그다.
“저를 캐스팅하시는 분들이 다른 사람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데 진심이 느껴진다고 하세요.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게 진심이 없으면, 보는 사람들이 알 거라고요. 그리고 저는 정말 오랜 고민 끝에 배역을 얻은 적이 많거든요. 언제나 연기라는 키워드에 얽매여 있는데, 작던 초라하던 그 배역은 저를 위한 기회잖아요. 그 때 교만할 수 없죠. 전작을 보면 부끄러울 때가 있고, 왜 저렇게 연기했을까 하는데,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지금 저 상황에 가라고 하면 저렇게 못할 것 같거든요. 그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연기를 함에 있어 남규리에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열정이었다. 열정이 죽으면 그는 연기 인생이 끝난다고 여겼다. 그래서 기도할 때 열정을 앗아가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빈다고 한다. 폭 넓은 캐릭터를 위해 책과 씨름하고 각종 유수의 영화제의 예술 작품을 시청한다. 집에 있을 때도 인물을 표현하는 것을 위해 정진한다는 남규리다.
“그렇다고 계획은 없어요. ‘기생충’에도 나오잖아요. 무계획이 계획이라고.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긴 하는데, 삶의 흐름에 있어서는 기대하지 않으려고요. 현장에서 반응이 좋으면 또 기대를 하게 돼요. 그 기대를 또 내려놓는 작업을 하고, 그렇게 변해가고 있어요.”
많은 운명을 만났던 그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무계획으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꿈꾸는 운명은 있었다. 남규리가 원하는 운명은 영화다.
“영화는 좀 더 색다른 캐릭터를 할 수 있잖아요. 영화 안에 속하기도 힘들긴 한데, 꿈꾸는 건 자유니까요. 드라마도 재밌긴 한지만 영화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 수 있잖아요. 일본영화 ‘어느가족’ 같은 다큐성이 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드라마보다는 영화가 이 방면에서는 더 열려 있으니까, 그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