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진=롯데그룹)

“게으른 천재는 필요 없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쓴 거스 히딩크 전 한국국가대표팀의 어록이다. 내년이면 황홀했던 2002한일월드컵 20주년이다.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씻고 월드컵 4강을 안겨준 히딩크 감독은 지금도 두고두고 국민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히딩크 감독은 혁신을 위해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뜨렸다. 그라운드 안에서의 선후배 존칭 없애기, 멀티플레이어 육성, 무한 내부 경쟁을 실시했다. 과정은 어려웠지만 꿀맛 같은 결실을 얻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색채가 강했던 롯데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신동빈 회장의 지휘 아래 파격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조직개편에서 순혈주의가 깨졌다. 백화점 등 쇼핑 사업 대표로 김상현 전 홈플러스 부회장을 임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롯데그룹의 유통 부문을 총괄하는 수장에 비롯데 출신의 인사가 선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이번 인사에 있어 신동빈 회장은 변화와 혁신을 주도할 초핵심 인재 확보를 주문했다. 어떤 인재든 포용할 수 있는 개방성과 인재들이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춘 조직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롯데의 이같은 움직임이 지속적인 실적 부진에 따른 움직임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롯데그룹의 핵심 사업부문인 롯데쇼핑은 올해 3분기까지 누적 매출액이 11조7892억원으로 전년 대비 3.6% 감소했고 영업이익은 983억원으로 40.3% 줄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M&A를 비롯해 롯데그룹은 항상 조심스러웠다. 이번 조직 개편으로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신 회장의 파격은 지난달에도 이어졌다. 신 회장은 서울 이태원동 ‘구찌 가옥’ 매장을 방문해 모피 코트를 착용했다. 이후 동행한 배상민 롯데 디자인경영센터장은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관련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의 신 회장은 밝은색 상하의와 스니커즈를 착용했다. 당시 신 회장이 착용한 스니커즈는 롯데케미칼의 플라스틱 자원선순환 프로젝트인 ‘프로젝트 루프’(Project LOOP)를 통해 제작된 제품으로 알려지며 화제를 낳았다.

같은달 롯데그룹은 내년 1월부터 롯데쇼핑의 S1·S2로 나눠진 수석 직급을 하나로 통합한다고 알렸다.

기존에는 임원에 오르기까지 S1 3년, S2 4년 등 최소 7년이 걸렸지만 내년 직급이 통합되면 승진 연한이 줄면서 빠르면 5년차부터도 임원에 오를 수 있다.

9월에는 롯데지주 내 디자인경영센터를 신설했다. 초대 센터장으로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출신의 배상민 사장을 선임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미래 역량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다. 배 사장의 영입은 전략적 자산으로써 디자인 역량을 한층 높이겠다는 복안이다. 이번 디자인경영센터는 조직문화 개선을 이루겠다는 신 회장의 의지를 담았다.

하지만 도약을 위해 혁신을 시도하는 신동빈 회장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번 조직개편이다. 기존 순혈주의를 버리고 새로 영입한 인재들을 앞세워 체질 개선과 신성장 동력을 키워나감에 있어 적극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내년부터는 업계 전반적으로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시점이라고 본다. 코로나19 장기화에도 내실을 다진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 히딩크 감독은 기존의 관행을 깨뜨리고 본인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밀고 나갔다. 과정이 녹록지 않았지만 뚝심과 신념을 가지고 월드컵 본선만을 목표로 달렸다.

신동빈 회장도 롯데의 미래를 위해 과감히 칼을 빼들었다. 단순히 배고프다라는 말로는 부족한 현 롯데의 상황을 고려하면 신동빈 회장의 갈 길이 녹록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지휘하는 수장 아래 추후 롯데가 멋진 모습으로 탈바꿈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