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 한 장면
1996년 여름, 선배와 함께 간 부산 여행에서 묵은 첫 숙소는 여인숙이었다. 조그마한 방에 이불이 깔려있고, 오래된 선풍기가 ‘털털’ 거리며 힘겹게 바람을 내보냈다. 문 옆 바닥에 깔린 신문지의 용도는 신발을 올려놓는 곳이다. 밖에 놓으면 종종 다른 사람들이 훔쳐간다. 방에 들어서면 주인아주머니가 요구르트 2개를 주신다. 마당 수돗가에서 간단히 세수만 하고 들어가 잠을 청한다. 뭐 딱히 하거나 볼거리는 없다.
2004년 찾은 거제도에서는 민박에 묵었다. 사실 당시에는 민박이나 여인숙이나 큰 차이가 없다. 화장실과 세면실이 안에 있었다는 점 정도만 다르다. ㅁ자 형태의 민박집은 가운데 커다란 평상이 놓여있었다. 홀로 한 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학 신입생들이 10여 명이 단체로 놀러 왔다. 마당 평상을 홀로 차지할 수 없어서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 소주 몇 병, 막걸리 몇 병을 사서 와 합석한 기억이 있다.
2016년 봄 제주 올레길을 후배와 걸었다. 숙소는 딱히 정해놓지 않고, 걷다가 힘들어 멈춘 위치에서 찾기로 했다. 주로 한 코스를 완주하거나, 그 다음 코스 절반 정도에서 숙소를 검색했다. 4박을 묵는 동안 이용한 곳은 게스트하우스다. 성수기가 아니고 평일이기에 다소 한적했던 게스트하우스지만, 저녁때는 나름 몇몇이 파티 비슷하게 모여서 소주 한잔 했다. 대부분 올레길을 걷는 이들이었고, 나름의 사연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민박은 아직 적잖은 사람들이 찾고 있고, 펜션으로 모양을 바꾸고 있지만, 여인숙은 이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이 되고 있다. 시설 좋은 모텔이나 호텔의 가격도 많이 낮아졌고, 특히 게스트하우스의 확산은 여행자들의 잠자리 제공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깔끔하고 싸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되는 게스트하우스는 여인숙의 영역을 잠식했다.
며칠 전, 과거에 묵었던 속초의 여인숙을 찾았는데, 이미 게스트하우스로 변했다. 울산의 한 게스트 하우스는 베이커리카페로 변신했고, 군산의 여인숙은 군산문화창작공간으로 바뀌었다. 장생포의 45년 된 여인숙은 리모델링을 거쳐 아트스테이로 문을 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역사가 오래된 여인숙을 허물고 새로 무엇인가 짓는 것보다 그 공간을 유지한 채 재탄생시키는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인숙이 그 옛날 여행의 쉼터였음을 알려주면서도 현대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여인숙은 존재한다. 여수 중앙시장 인근에는 선풍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여인숙이 손님을 기다리고, 남원 버스터미널 인근에도 고단한 여행자를 맞이하는 여인숙이 있다. 그러나 그 곳을 지키는 주인할머니, 주인할아버지 뒤를 이을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렇게 숙박을 위한 여인숙은 사라지고 70~80년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추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