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이 100조원 시대를 맞았지만 사실상 ‘속빈강정’이라는 쓴소리가 새어나온다. 공모펀드 몰락으로 자산운용사업계내 유일한 먹거리가 돼 버린 ETF시장을 두고 벌어지는 과열경쟁의 부작용이 낳은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 삼성·미래운용 치열한 경쟁 속 ‘허수’ 논란
2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ETF 순자산총액은 21일 기준 108조733억원에 달한다. 올해 6월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한 이후 꾸준한 증가세다. 신규 출시 상품 수는 2020년 45개에서 지난해 139개로 급증했다. 지난달 일평균 거래대금 역시 1년 전에 비해 50% 이상 증가하는 등 관련 지표들이 모두 화려한 성장세다.
하지만 성장의 실체를 놓고서는 뒷말이 무성한 것도 현실. 시장은 100조원대까지 커졌지만 실제 개인 투자자 유입에 따른 성장이라기보단 과열 경쟁에 따른 상품 출시 및 자금유치가 불러온 ‘허수’라는 것이다.
실제 ETF 전체 순자산액은 지난해 말(78조5116억원) 대비 30조원 가량 늘어났지만 이중 개인들의 순매수 규모는 극히 일부에 그쳤다.
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개인들의 ETF 순자산액(22일 기준)은 연초 대비 4조188억원 증가한 25조원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이 중 시장 상승에 따른 변동금액이 2조9440억원임을 감안하면 실제 개인 순매수 규모는 전체 증가분의 1/30 수준인 1조748억원에 불과하다.
운용사별로는 미래에셋자산운용 TIGER ETF으로 6021억원 순매수가 유입된 반면 삼성자산운용은 되레 8000억원 이상이 순매도된 것으로 집계됐다. 두 회사의 올해 순자산 증가폭인 11조~12조원 수준과 격차는 상당하다.
시장 관계자들은 이 같은 순자산 증가 원인으로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 간 선두권 경쟁을 꼽는다. 두 회사는 점유율이 3%p 안팎까지 좁혀졌다. 1위 자리를 사이에 둔 경쟁은 더없이 치열하다. 이러한 성과 유지 전략으로 각사가 자체 보유 자산과 투자시장의 유동성 자금을 ETF 계좌에 편입, 자산 불리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삼성운용과 미래에셋운용이 운용사 전체 규모로도 국내 1,2위를 차지하고 있는만큼 내부적으로 펀드의 유동성 공급 등을 위해 보유중인 자금을 자사 ETF에 투자하거나 LP(유동성공급자) 증권사들을 통해 설정 규모를 확대하는 규모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시장에서 이들 입지가 확고한 만큼 영향력은 더 강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펀드 설정액이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공모펀드와 달리 ETF는 LP로부터 모집한 초기자금을 기반으로 상장한다. 특히 합성ETF 상장 규모가 확대되면서 자산운용사들은 이해관계가 맞물린 증권사 LP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다.
한 증권사 LP 담당자는 “일반적인 ETF들이 80억~100억원대로 설정해 상장하는 반면 체급이 있는 운용사들의 경우 주력 상품에 대해 설정액을 더 신경써달라는 압박이 종종 있다”며 “스왑을 통해 거래관계가 유지되는 만큼 증권사로서도 이를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귀띔했다.
실제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상장된 165개 ETF 가운데 최초 설정일 기준 순자산액 1000억원 이상인 ETF 16개 가운데 미래에셋운용(8개)과 삼성운용(4개)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한국투자신탁운용, 한화자산운용, NH-아문디운용 등 타 운용사들의 최초 설정액이 대부분 80억~100억원 규모인 데 비해 압도적인 규모다.
여기에 각 운용사의 계열사를 통한 자금 유입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경쟁을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업계 안팎의 판단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ETF 경쟁이 심화되면서 채권 자산 비중이 높은 보험사들이 각 계열사의 채권형 ETF로 자금을 몰아주는 경향이 짙다”며 “시장 왜곡이 생기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 "무조건 버텨라"...밑빠진 독에 물붓는 중소형사
자산운용업계내 피 튀기는 경쟁은 1,2위사만의 일은 아니다. 선두를 지키는 운용사들 틈새에서 존재감을 보이려는 중소형사들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결국 단기간 효과 증대를 위해 제살 깎아먹기식의 운용보수 인하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국 배당주 투자 ETF들을 꼽을 수 있다. 지난 2021년 10월 한국투자신탁운용이 ‘ACE미국배당다우존스 ETF’를 출시한 뒤 지난해 11월 신한자산운용 역시 ‘SOL 미국배당다우존스 ETF’를 상장했다.
이들 ETF가 시장의 수요와 맞아 떨어지자 지난 6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은 ‘TIGER 미국배당다우존스 ETF’를 출시했다. 출시 당일 2830억원의 설정액으로 앞선 두 회사의 규모를 압도하자 한국투자신탁운용은 며칠 후 보수를 기존 0.06% 수준에서 0.01%까지 인하하는 강수를 뒀다. 하지만 미래에셋자산운용도 바로 보수를 0.01%로 낮추면서 결국 신한자산운용 역시 ‘SOL 미국배당다우존스 ETF’에 대한 인하 방침을 정한 상태다.
이로써 이들 상품의 총보수는 0.01%(1bp)로 낮아졌지만 통상 총보수에 지정참가회사보수, 운용보수, 수탁은행보수, 사무수탁회사보수 등이 포함돼 있음을 감안한다면 운용사가 가져가는 이익은 최저 0.03bp 안팎까지 낮아진다. 즉, 해당 ETF의 설정액이 1000억원에 도달하더라도 실제 운용사가 이를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은 300만원에 그치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과열경쟁이 자칫 자산운용시장의 건전한 성장에도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업계 고위 임원은 “운용업계 전체가 모두 ETF 시장에 올인하면서 상위권 운용사들은 1위 경쟁을, 중소형사들은 3년, 5년 후를 위해 당장의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형사들은 입지를 이용해 시장을 왜곡시키는 행위를 일삼고 중소형사들은 사실상 수익 감소를 불사함에 따라 중장기적으로 투자자들에게 다양한 상품을 제공할 수 있는 여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