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에 다시 한 번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올해 초 '돈 잔치' 발언에 따른 후속대책으로 은행들이 자의 반 타의 반 '경영현황 공개보고서'를 내놓은 날 대통령의 날선 지적이 나왔다.
'상생금융'이란 이름 아래 은행들이 취약계층 지원 등에 나서며 나름대로 성의표시를 해 왔지만 돌아온 건 더 강한 '채찍질'이다보니 은행권의 '좌불안석'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정치권을 중심으로 '횡재세' 도입까지 논의되고 있어 향후 은행권 대응에 관심이 모아진다.
■ '돈잔치', '종노릇' 이어 '독과점' 작심 발언
지난달 30일 '종 노릇' 발언이 나왔을 때만 해도 금융권에선 대통령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들께서는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마치 은행의 종 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
대통령의 은행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다시 한 번 확인되자 당일 주식시장에선 금융지주사들의 주가가 떨어졌고, 대통령실은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해 드리는 차원"이라고 해명하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틀 뒤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비상경제회의에서 대통령의 숨은 진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갑질을 많이 한다. 은행이 과점 상태, 일종의 독과점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자꾸 경쟁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은행의 독과점 행태는 정부가 그냥 방치해서는 절대 안 된다."
지난 2월 대통령의 '돈 잔치' 비판에 따라 금융당국은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대환대출 시스템 구축, 지방은행의 시중은행 전환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약 8개월 동안 당국이 쉼 없이 대책을 쏟아내고 금융권에서도 적극 호응했기에 '이 정도면 됐겠지' 안도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대통령은 "(은행들이) 앉아서 돈을 벌고 그 안에서 출세하는 것이 문제"라며 "강하게 우리가 밀어붙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에 대통령이 전혀 만족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히 확인된 것이다. 당국으로선 더 강한 채찍을 휘둘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
■ 금융권 "총선 앞두고 공적 됐다"
은행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데 이어 올해에도 역대 최대 실적이 예상되는 만큼 어느 정도 비판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각오는 했지만 비판의 강도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은행뿐만 아니라 전 금융업권에서 현 정부의 '상생금융' 기조에 적극 호응해 왔기에 더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 발언 시점이 오묘하다"며 "하필 '은행 경영현황 공개 보고서'가 발표된 날 작심한 듯 은행을 공적으로 삼았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국의 지시에 따라 은행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시범 발표한 보고서에는 임직원 보수 등 민감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고, '이자 장사', '돈 잔치' 비판 기사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하필 그 날을 콕 찍어 비상경제회의를 외부에서 사전 기획한 것은 총선을 앞두고 은행을 공적으로 삼아 표심을 얻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금융권의 다른 관계자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최악인 상황에서 성난 민심을 달래고 지지율을 끌어 올리려면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은행과 카카오가 불행하게도 그 대상이 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가계부채, 부동산 PF 부실 등으로 경기 부양책을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은행 및 카카오 때리기'가 채택됐다는 분석이다.
■ "대통령 시각, 노무 올드하고 편협"
금융권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은행 비판이 너무 올드하고 편협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은행에서는 기획 부서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올라가지, 일선에서 영업한 사람들을 간부로 최고위직에 잘 안 올려보낸다. 옛날에 론스타가 한국에 들어와서 외환은행을 먹은 다음에 대기업 기업대출을 다 줄이고 가계대출하고 카드 가지고 돈을 많이 벌었다. 기업대출에 비해서 가계대출이나 소상공인대출이 더 부도율이 적고 대출채권이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자세로 영업을 해가지고 이게 되겠느냐. 그러니까 이 체질을 좀 바꿔야 한다."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금융권에서는 '오래 전도 한참 오래 전 이야기'라며 억울해한다.
앞선 금융권 관계자는 "대통령께서 과거 검사 시절 론스타 수사 경험을 통해 현재의 금융권을 바라보고 계신 것 같은데 업데이트가 필요한 상황으로 보인다"며 "가장 보수적이라는 은행들조차 영업통이 CEO에 오르는 것이 최근 수년의 대세"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하나금융지주는 김정태 전 회장부터 현 함영주 회장까지 '정통 영업맨'을 CEO로 선임해 왔다. 신한은행, SC제일은행, 수협은행 등의 CEO도 '영업통'이다. 우리금융 역시 최근 조병규 우리금융캐피탈 대표가 기업 영업의 강점을 인정받아 은행장에 선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은행 때리기'는 '팩트'와 무관하게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우리나라 40대의 1인당 대출액은 1억4000만원에 달한다. 가계대출 전체 규모는 1800조원을 넘어섰다. 거의 대부분의 가구가 대출 원리금 상환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들은 '사상 최대 수익'을 거두고 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7월 '은행 경쟁 강화' 대책 발표 당시 "은행산업이 경쟁이 제한된 산업의 특성을 기반으로 손쉽게 수익을 내면서 변화 노력은 부족하다는 국민의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며 점잖게 은행들의 변화를 촉구했지만 앞으로는 압박의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주부, 회사원, 소상공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