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매대에 진열된 라면들. (사진=김성준 기자)
연초부터 시작된 먹거리 가격 도미노 인상이 ‘서민음식’ 라면까지 넘어뜨렸습니다. 라면업계 1위인 농심이 가격 인상을 단행하면서 다른 제조사들도 가격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분위기인데요. 최근 식품업계에서 잇달아 가격조정에 나서면서, 정부가 물가안정을 명목으로 이어온 ‘가격 옥죄기’ 부작용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11일 농심에 따르면, 이 회사는 오는 17일부로 라면과 스낵 등 17개 브랜드 출고가를 평균 7.2% 인상하기로 했습니다. 농심이 제품 가격 인상에 나선 것은 2022년 9월 이후 2년6개월만입니다. 소비자 입장에선 가격인상이 달갑지 않은 소식이지만, 투자자들에겐 달랐습니다. 인상 발표 당일인 6일 농심 주가는 38만9500원으로 전날 대비 무려 10.7%나 껑충 뛰었죠. 전체 증시가 하락세인 11일에도 농심 주가는 한때 40만원을 넘어서는 등 선전하고 있습니다. 가격인상으로 수익성 개선 효과가 나타날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된 덕분입니다.
농심 관계자는 이번 가격인상에 대해 “라면과 스낵 주요 원재료인 팜유와 전분류 등 국제 가격이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환율과 인건비 등 제반비용 상승을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면서 “경영여건이 더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4분기 농심 영업이익률은 1.7%까지 떨어졌습니다. 영업이익률이 낮은 식품업종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상당히 낮은 수치죠. 농심 수익성 악화 원인으로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꼽히는데요. 대표적으로 국제 팜유 선물 가격(25미터톤, 종가 기준)은 2022년 9월 718달러였지만, 올해 들어선 줄곧 1000달러 이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가격인상 시점보다도 40% 이상 높아졌죠. 게다가 농심은 앞서 2023년 7월 대표제품인 ‘신라면’과 ‘새우깡’ 출고가를 각각 4.5%, 6.9% 인하하기도 했었습니다. ‘절실한 상황’이라는 회사측 해명이 빈말은 아닌 셈입니다.
업계 1위인 농심이 가격 인상에 나서면서 다른 라면 제조사도 가격인상 여부에도 관심이 모이는데요. 오뚜기와 삼양식품은 현재 가격 인상 계획이 없다고 밝혔지만, 식품업계에서는 통상 1위 업체가 가격조정에 나서면 후발주자들이 뒤따르는 양상을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2023년 가격 인하 당시에도 라면 3사들은 일제히 가격을 조정한 바 있죠.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2023년 당시 정부에서 가격 인하 압박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은 ‘밀가루 가격 하락’이었지만, 현재 다른 주요 원재료 가격이 모두 오른 상황”이라며 “가격을 내릴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무리해서 가격 인하를 단행했던 만큼, 1위 업체의 가격 인상 결정을 보고 다른 제조사들도 가격 조정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귀띔했습니다.
■명분은 ’원가부담’, 속내는 “지금 아니면 못 올릴지도”
팜유 원료인 기름야자 열매. (사진=픽사베이)
최근 가격 인상에 나선 것은 라면뿐만이 아닙니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말이 절로 실감되는 상황인데요. CJ제일제당은 ‘비비고 왕교자’ 가격을 5.6% 인상하는 등 이달부터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만두, 햄, 소시지 등 판매가를 조정했습니다. 동원F&B도 이달부터 편의점을 제외한 유통채널에서 판매되는 냉동만두 15종 가격을 평균 5% 올렸죠. 이밖에도 올해 초엔 스타벅스, 컴포즈커피 등이 커피 가격을 인상했고, 롯데웰푸드, 빙그레,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등 제과·제빵 업체들도 제품 가격을 올린 바 있습니다.
식품업계는 잇단 가격 인상을 두고 주요 원자재 가격 상승을 반영한 조치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지난달 아라비카 커피원두 평균 가격은 톤당 8761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114% 올랐고, 1월 카카오 평균 가격도 톤당 11160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150% 폭등했습니다. 세계적인 이상기후에 따른 주요 산지 작황부진이 원인인 만큼 뾰족한 대안을 내놓기도 어렵습니다. 원가 부담을 온전히 감내하기 힘든 기업 입장에서는 결국 가격 인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이런 점을 고려해도 다양한 먹거리 가격이 대거 오르는 현상을 납득하긴 어렵습니다. 각 원재료 가격이 고점을 기록한 시점이나 기업별로 원가 상승을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이 서로 다를텐데, 가격인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번에 이뤄지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탄핵 정국으로 정부의 ‘물가통제’ 고삐가 약해진 것이 ‘도미노 인상’을 불러왔다는 의견도 제기됩니다. 그간 정부 압박으로 가격을 올리지 못했던 업체들이 이번 기회에 서둘러 가격 인상에 나섰다는 해석인데요. 그간 꾸준히 지적됐던 강압적인 물가통제의 부작용이 현실화됐다는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통령 직속으로 ‘민생물가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습니다. 치솟는 물가를 관리하기 위해 28개 품목에 대해 물가 관리 전담자를 지정하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응한다는 취지였죠. 이후 정부는 주요 식품기업들을 불러모아 간담회를 여는 등 몸소 나서서 가격 인상을 억제해 왔습니다. 일례로 지난 2023년 6월 치솟았던 국제 밀 가격이 하락세로 접어들자 정부는 라면 업계를 직접적으로 압박했습니다. 당시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기업들이 국제 밀 가격이 내린 부분에 맞춰 라면값을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요. 해당 발언 이후 9일만에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등은 연이어 가격 인하를 발표했죠.
물가 컨트롤타워를 대통령실이 직접 맡은 것은 2011년 이명박 정부 이후 13년만이었는데요. 이 같은 정부 행보에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정부가 시장 가격에 지나치게 개입하면 향후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과거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MB물가’로 특별관리한 52개 생필품 물가는 3년여간 일반소비자물가보다 더 큰 폭으로 올랐습니다. 보여주기식 ‘관치 물가정책’은 겉으로만 요란할 뿐 실질적인 성과를 내긴 어렵다는 사례로 남았죠. 윤석열 정부가 내건 물가정책도 이명박 정부 물가정책을 빼닮은만큼, 시행 초기부터 같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비판이 나왔습니다.
최근 이어지는 식품가격 줄인상은 결과만 놓고 보면 앞선 정책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입니다. 전문가들이 꾸준히 지적해왔던 것처럼, 가격 인상을 억눌려왔던 기업들이 ‘기회’가 오자 보다 큰 폭으로 가격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기업들은 상시적인 가격 조정이 어려운 만큼, 가격을 올릴 수 있을 때 올려둬야 수익성 악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정부는 할당관세와 세제혜택 등 기업 부담 완화를 위한 지원책을 펼치고 있으니,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당장 수익성 악화를 목전에 둔 업체들에게는 공허한 지적이 되고 있습니다.
식품업체 한 관계자는 “할당관세 등을 내세워 정부가 기업에게 여러 혜택을 주는 것처럼 말하지만, 기존 유지되고 있던 정책에서 추가적으로 혜택이 더해지는 부분을 따져보면 미미한 수준”이라면서 “기업 입장에서 실제 체감할 수 있을만한 지원책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에게 부담을 온전히 감당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