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제2회 한국기업거버넌스 대상 시상식에서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김용범 메리츠금융지주 부회장(왼쪽에서 6번째), 강성부 KCGI자산운용 대표 등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자료=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홈페이지)
개혁은 변화를 불러온다. 2015년 시작된 금융개혁으로 현장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표적인 게 인터넷전문은행이다. 24년 만의 은행 인가였다. 계좌이동서비스의 도입으로 은행 간 경쟁이 촉발됐다. 출시 약 1년 만에 1000만건의 자동이체 계좌가 변경됐다. 신·기보 연대보증 폐지로 창업가들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고, 공인인증서 사용의무가 폐지돼 비대면 금융거래가 한결 수월해졌다. 보험 분야에도 큰 변화가 생겼는데, ‘보험상품 자율화’라는 이름으로 22년 만에 관련 규제가 전면 개편됐다.
보험이 전면 개혁의 대상이 된 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다. 금융당국이 2015년 4월부터 금융개혁 현장점검반을 가동한 결과 4대 권역 가운데 보험 분야에서 가장 많은 건의사항(1630건)이 접수됐다. 이는 보험 분야의 변화 욕구가 가장 강하다는 의미다. 바꿔 말하면 뜯어고칠 게 가장 많다는 의미기도 했다. ‘개혁은 책상이 아닌 현장에서 나온다’는 방침에 따라 민관합동 TF를 만들어 실태 파악에 나섰다. 5월부터 5개월 동안 총 20차례 회의를 거쳐 2017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할 ‘보험산업 경쟁력 강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핵심은 보험상품·자산운용 자유화 조치였다. 판매채널 위주의 양적 경쟁에서 상품·서비스 위주의 질적 경쟁으로 전환하겠다는 취지다. 기존에는 보험상품을 개발할 때 당국에 사전신고를 해야 했지만 이를 사후보고제로 바꿔 자율성을 높였다. 보험료 산정시 적용되는 위험률 조정한도(±25%)를 폐지하는 등 보험상품 가격 역시 보험사가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했다. 보험회사의 자산운용 규제 패러다임 또한 사전적·직접적 통제에서 사후적·간접적 감독 방식으로 바꿨다. 후순위채 발행 요건 완화, 신종자본증권 상시 발행 등 보험회사의 자본조달 다양화도 이때 허용됐다.
■ "금리, 수수료, 배당 등 가격 불개입"
무엇보다 당시 개혁에는 보험에만 국한되지 않는, 금융권 전 영역에 적용되는 핵심 원칙이 한가지 있었다. 금융당국이 금리, 수수료, 배당 등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들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가격 불개입 선언’이다.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현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민간 금융회사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려면 금융당국부터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봤다. 취임 당시 “선수들의 작전을 일일이 지시하는 ‘코치’가 아니라, 경기를 관리하는 ‘심판’으로 금융당국의 역할을 바꾸겠다”고 밝힌 배경이다. ‘가격 불개입 선언’은 이를 실천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자, 의지의 표현이었다.
민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보장하기로 한 만큼 당국은 금융회사들도 변화에 적극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산성과 전문성을 키워 달라는 주문이다. 솔선수범 차원에서 산업은행, 기업은행, 신용보증기금 등 금융 공공기관부터 MOU를 맺고 ‘성과중심’ 문화 확산을 독려했다. 이듬해 성과연봉제 도입이 이슈로 떠올라 금융노조의 파업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국내 금융산업에 생산성 향상과 전문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고 있었다.
■ "자본력보다 사고력"...김용범의 극단적 효율경영
2015년 금융개혁의 흐름을 타고 가장 적극적으로 변신한 회사를 꼽으라면 메리츠화재를 빼놓을 수 없다. 때마침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의 ‘믿을맨’인 김용범 메리츠종금증권 대표가 2015년 1월 메리츠화재 CEO를 맡았다. 극단적 합리주의자로 평가받는 김 대표는 ‘단순화, 최적화, 정도경영’ 3가지 기치를 내걸고 곧바로 조직개편에 들어갔다. 34개 임원 자리를 15개로 줄이고 본부제를 폐지해 몸무게를 확 줄였다. 지점과 영업소를 통폐합해 2014년 308개였던 점포가 2016년 168개로 절반 가량 줄었다. 지금에야 현장 중심의 효율화 조치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창립 93년 만에 처음 일어난 대대적 구조조정으로 이해됐다.
몸집을 줄여 확보한 자금은 모두 영업에 투입됐다. 특히 GA(법인보험대리점)를 적극 활용했다. 적자 상품인 자동차보험 대신 수익성이 가장 좋은 납입기간 3년 이상의 ‘장기인보험’ 상품 판매에 집중했다. 어느 정도 단기 매출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전속설계사 수수료를 1000%로 인상하며 영업력 강화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메리츠화재의 영업인재 모시기로 스카웃 열풍이 불자 경쟁사들은 ‘업계 금기를 깼다’며 당국에 민원까지 넣었다. ‘설계사 빼가기’에 골이 난 GA는 메리츠화재 상품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메리츠화재는 일취월장했다. 2014년 1127억원이었던 당기순이익은 2015년 1713억원, 2016년 2578억원, 2017년 3551억원으로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현장 중심, 영업 중심, 효율성 중심의 공격적 경영의 성과가 숫자로 입증된 것이다. 덕분에 김용범 대표는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조정호 회장 다음의 2인자 지위를 공고히 했다. 연임에 연임을 거듭해 현재는 워렌 버핏처럼 그의 연임에 토를 다는 이가 없는 사실상 ‘종신 경영자’의 반열에 올랐다.
■ 금융개혁 올라타 순익 1.7조, 업계 2위 '도약'
김용범 부회장이 메리츠화재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의 크기는 자본의 크기가 아닌 생각의 크기로 결정된다”는 혁신적 발상에서 대부분 기인했겠지만 당시 불었던 금융개혁 바람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안팎의 중론이다. 금리와 수수료 결정에 자율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GA를 활용한 공격적인 영업전략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손보 업계에서는 메리츠의 ‘틀을 깨는 전략’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 보는 시선이 팽배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한화생명 등 메리츠화재의 성공을 목도한 경쟁사들이 ‘자회사형 GA’를 설립하며 업계 판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모두 보험상품 자율화라는 개혁 바람이 불러온 변화였다.
보험사의 실적은 크게 3가지에 좌우된다. 상품 경쟁력, 영업 경쟁력, 운용 경쟁력이다. 메리츠화재는 매력적인 상품을 만들어 공격적으로 판매하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들어온 돈을 잘 굴리는 능력도 탁월했다. 금융개혁으로 자산운용 규제가 느슨해진 점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기업금융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공격적으로 뛰어든 덕분에 순이익이 2023년 1조원을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1조7000억원을 넘어 업계 영원한 1위 삼성화재(2조478억원)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만년 5위 메리츠화재가 10년 만에 현대해상, DB손보, KB손보를 누르고 업계 2위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다만, 보험상품 자율화는 상당한 부작용도 낳았다. 새로운 회계제도(IFRS17) 시행을 맞아 보험사들이 판매채널에 의존한 양적 경쟁에만 몰두하면서 불완전판매, 보험사기 등 보험 민원이 급증했다. 지난해 발족한 보험개혁회의를 통해 어느 정도 수습이 되는 분위기이지만 여전히 시장 혼란의 불씨는 남아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2015년 시행된 보험상품 자율화 조치가 보험회사에 대한 당국의 감독, 검사, 제재 체계를 완전히 바꿨다”며 “메리츠화재처럼 큰 혜택을 본 기업도 있지만 소비자 민원이 급증하고 시장이 혼탁해진 측면도 있기 때문에 공과를 잘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메리츠금융은 2015년 금융개혁 흐름에 올라타 10년 만에 삼성화재에 이어 업계 2위 자리에 올랐다. 정부의 밸류업 프로그램이 시행되기 훨씬 전부터 주주환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지배구조 모범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자료=메리츠금융)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한 가전업체가 광고에 사용했던 이 슬로건은 우리나라 광고사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이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전에 경영자와 임직원은 수 많은 고민과 검토, 논의를 거듭한다. 그렇게 결행한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 판단은 10년 후 기업을 바꿔놓는다. 뷰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지난 10년 전 내렸던 판단이 현재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고 아울러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