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츠화재·삼성생명 사옥 전경
삼성생명은 지난달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지급여력비율(K-ICS)이 180% 초중반 수준(2024년 말 기준)일 것으로 예상했다. 지급여력비율은 가용자본에서 요구자본을 나눈 값으로, 보험사의 재무건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다. 금융당국은 계약자들이 보험금을 제때 받을 수 있도록 150% 이상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삼성생명은 업계 1위답게 늘 당국 기준을 훨씬 웃돌아 200% 이상으로 K-ICS 비율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2023년 219%였던 삼성생명의 K-ICS 비율이 1년 만에 180%대로 40%포인트 가까이 떨어진 것. 당국의 보험개혁 추진과 시장금리 하락 추세, 삼성전자 주가 하락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시장에선 삼성생명마저 200% 선이 무너지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관련 대책을 묻는 질의에 재무담당자는 “공동재보험 출재 등 기본적인 ALM(자산부채관리) 강화 대책을 추진하되, 자본성 증권 발행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답했다. 가용자본을 늘리기 위해 이자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실 삼성생명은 마음만 먹으면 이자비용 없이 손쉽게 K-ICS 비율을 높일 수 있는 회사다. 자산 포트폴리오에서 지나치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 지분 매각 등 보유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만 하면 된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51%(5억390만주)를 갖고 있다. 13일 종가 기준 무려 27조5636억원의 가치다. 삼성생명 전체 운용자산(243조원)의 10%를 넘는 규모다. 지난해 상반기 7만원 위에서 움직이던 삼성전자 주가는 연말 5만원대 초반까지 급락했다. 7월 고점 대비 5개월 만에 40%나 빠졌다. 삼성전자 주가 급락은 삼성생명의 보유자산 가치를 떨어뜨리고, 이는 K-ICS 비율의 추락으로 연결됐다.(관련기사 : [삼성과 금융] 삼성생명 주주·계약자는 두 다리 뻗고 자도 될까)
삼성전자 비중 축소가 합리적인 선택지이지만 삼성생명으로선 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금기다.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이어지는 그룹의 지배구조에서 생명의 전자 지분 매각은 총수 일가의 지배력 약화를 불러온다. ‘재벌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내국인에겐 익숙한 풍경이지만 ‘글로벌 스탠다드’를 중시하는 외국인에겐 납득하기 어려운 ‘상식 밖 대응’이다. 소수 재벌의 이익을 위해 다수 일반 주주의 희생을 당연시한 결과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삼성생명이 업계 1위임에도 PBR(주가순자산비율)이 0.4배에 머무는 것은 총수의 이익에만 충실하며 투자자들의 상식을 외면한 결과로 볼 수 있다.
■ K-ICS 추락, 삼성생명의 자사주 정책
보다 못한 정부가 팔을 걷어붙였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고 지난해 초 추진한 정책이 기업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이다. 4대 금융지주를 포함해 금융회사 대부분이 앞다퉈 밸류업 계획을 내놨지만 삼성생명은 1년이 넘도록 묵묵부답이다. 3~4년 내 배당성향 5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 제시만 반복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총수 일가의 그룹 지배력 유지와 비상금고 역할을 경영목표 1순위에 두다 보니 능력과 의지가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삼성생명의 자사주 소각은 총수 이익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생명은 이미 자기주식 10.2%(2042만주)를 보유 중이다. 보유 중인 자사주 일부만 소각해도 주가 상승 등 일반 주주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지만 선택지가 될 수는 없다. 애초에 삼성이 주주환원 목적으로 자사주를 매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사주는 의결권도, 배당도 없는 주식이지만 오너의 경영권 방어에는 효자 노릇을 한다. 경영권이 위태로울 때 백기사에게 자사주를 넘기거나 맞교환하면 우호 지분을 늘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회사 인적 분할시 자사주 몫의 신주배정을 통해 자기 돈 한 푼 쓰지 않고 지배력을 키울 수도 있다. 회삿돈으로 오너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자사주 매입이다.
오너 금융사를 중심으로 일각에선 자사주 소각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사업 재투자에 쓰일 귀한 자금이 주주환원이라는 이름으로 ‘나눠먹기’ 식으로 낭비된다는 논리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위기에 대비해 충당금이라도 더 쌓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나 논리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메리츠금융지주는 온몸으로 보여줬다.
메리츠금융지주(좌)와 삼성생명(우)의 주가 월봉 차트(자료=키움증권 HTS)
■ 삼성생명 '밸류업 침묵' vs 메리츠금융 '1호 공시'
한진그룹 창업주의 막내아들인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은 2022년 11월 지배구조 개편을 전격 발표했다. 메리츠금융지주만 상장사로 남기고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을 상장 폐지한 후 완전 자회사로 편입했다.
2023년 4월 통합 ‘원 메리츠(One Meritz)’가 출범하자 시장은 크게 반겼다. ‘대주주의 1주와 소액주주의 1주는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조 회장의 신념은 기업분할, 중복상장에 신물이 난 개인 투자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오너 스스로가 지분율 감소(76%→47%)를 감수하는 모습도, 그룹 순이익의 50%를 주주들에게 환원하겠다는 약속도 한국 자본시장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 모든 조치는 정부의 밸류업 정책 전에 이뤄진 일이다.
시장 환호는 ‘메리츠 신화’로 이어졌다. 출범 첫날 시가총액 10조원에 육박하며 우리금융지주를 앞지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시총 20조원을 돌파, 금융권 시총 2위인 신한지주를 처음으로 앞지르기도 했다. 은행 계열사 없이 이뤄낸, 대한민국 대표 재벌 삼성조차 이루지 못한 이변이었다. 2022년 11월 3만원대에 머물던 주가는 지난달 12만원을 돌파하며 3배 넘게 뛰었다. PBR은 1배조차 ‘꿈의 목표’인 다른 금융지주들과 달리 이미 2배를 넘겼다. 밸류업 공시 역시 국내 금융지주 중 가장 먼저 실시했다. 컨퍼런스콜을 일반 주주에게도 개방, '열린 IR'의 모범을 보여줬다.
메리츠금융의 성공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핵심은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는 조 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과감히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삼성금융과 메리츠금융의 결정적 차이다. 3세 경영을 위해 각종 위법·탈법을 자행해 10년 넘도록 사법리스크에 시달리는 삼성그룹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관련기사 : [삼성과 금융] 오로지 총수 이익...국민을 배신하다)
■ 금융당국 '모범관행' 해법 제시...효과는 '미지수'
보험개혁회의는 지난 1월 제6차 회의를 열어 ‘보험회사의 장기·안정적 경영 유도방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경영진 성과보수 체계 합리화, 보험회사 지배구조 개선, 보험권 표준내부통제기준 마련 등이다. 경영진이 단기성과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보상체계 모범관행’을 마련하고, 지배구조 역시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모범관행’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 대책이다. 올해 준비기간을 거쳐 내년부터 시범운영에 들어간다. 다만, 효과에 있어선 의문부호가 붙는다. 삼성생명·삼성화재, 한화생명·한화손보, 현대해상, DB손해보험, 교보생명, 미래에셋생명, 흥국생명·흥국화재 등 은행지주와 달리 보험회사들의 경우 상당수가 오너십이 작동하고 있어서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메리츠금융 사례가 보여주듯 오너가 의지를 갖고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지배구조 문제는 현실적으로 개선하기 어렵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험사의 경우 경영의 연속성과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곳인만큼 글로벌 정합성을 갖춘 가이드라인 마련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자료=보험개혁회의
자료=보험개혁회의
지난해 5월부터 진행된 보험개혁회의가 마무리 수순이다. 금융당국은 마지막 7차 회의에서 미래 대비 방안을 논의한 후 상시개혁 체제로 전환할 방침이다. 그 동안 수많은 이슈가 쏟아져 나왔지만 사실 담당기자 본인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이가 이 정도인데 생업에 바쁜 소비자나 투자자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지난해 9월 진행한 [보험개혁 Why] 시리즈에 이어 [보험개혁 How] 시리즈를 통해 그 간극을 좁혀본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