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정상회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결국 ‘아빠의 말’을 따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국방비 GDP 5% 증액안이 지난 6월 네덜란드 헤이그 나토 정상회의에서 공식 합의된 것이다. 3.5%는 군사비로, 1.5%는 기반 인프라에 투자하는 조건이다.

그러나 이른바 ‘헤이그 선언’은 유럽 각국에 구조적 모순을 던지고 있다. 무기 국산화를 통한 전략적 자율성을 외치지만, 여전히 실질 조달은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 때문이다. 방산을 둘러싼 이 ‘이념과 시장의 괴리’는 한국 방산 산업엔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요구 수용…하지만 지갑은 버겁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후 줄곧 “나토는 미국만 믿고 무임승차하고 있다”며 유럽 회원국들의 방위비 증액을 압박해왔다. 취임 직후엔 기존 GDP 2% 목표보다 훨씬 높은 5%를 제시했고 이번 정상회의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그는 “유럽과 서방 세계의 큰 승리”라고 자평했지만 유럽 국가들의 속내는 복잡하다.

유럽연합(EU)과 국제전략연구소(ISPI) 등에 따르면 GDP 5%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국가는 현재로선 독일, 폴란드, 북유럽 3국 정도에 불과하다. 유로존 평균 국가 부채 비율은 이미 87.4%에 달하며 복지 지출과 고령화에 따라 국방비를 늘릴 여력은 제한적이다.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는 “합의는 쉬웠지만 이행은 어렵다”고 토로했다.

유럽 무기 시장, 미국산 일색…“자립하겠다” vs “지금은 안 돼”

유럽은 무기 구매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유럽 나토 회원국의 무기 수입 중 64%가 미국산이다. 전투기, 미사일 방어체계, 포병장비 대부분이 그렇다. 유럽 공군에 실전 배치된 전투기의 46%가 미국산이며, 방공 시스템도 절반 가까이가 미국산이다.

이에 유럽 각국은 자국 내 방산 산업 육성에 나섰다. EU는 ‘ReArm Europe’ 계획을 통해 8000억 유로를 투입할 예정이며 이 중 15억 유로는 유럽 기업을 통해 직접 무기를 조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미국산 무기 대신 유럽제를 확대하려는 이 전략은 생산능력, 기술력, 속도 면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대포병탐지레이더-Ⅱ(사진=방위사업청)

한국 방산, 지정학 틈새에서 ‘기회의 창’

한국 방산 기업은 유럽의 이 같은 혼선 속에서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K9 자주포, K2 전차, FA-50 전투기 등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신속 납기’와 ‘검증된 성능’으로 주목받고 있다. 폴란드는 한국 무기를 대규모로 도입하며 유럽 내 한국 방산의 대표 고객으로 떠올랐다.

지정학적 중립성도 경쟁력이다. 미국산 장비의 정치적 리스크나 유럽 내 갈등과 무관한 한국산 무기는 독립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국가들에 ‘제3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방산업계에서는 “유럽산은 느리고, 미국산은 부담스럽고, 한국산은 적당한 중간값”이라고 평가가 대세다.

유럽의 재무장은 무기 그 자체보다 ‘경제정책’에 가깝다. 독일 라인메탈, 영국 BAE시스템스, 프랑스 탈레스, 이탈리아 레오나르도 등 유럽 방산업체 주가는 올 들어 60~180%가량 급등했다. 자동차 업계 등 제조 인프라가 방산으로 옮겨가면서 산업 재편이 일어나고 있고 고용 확대와 투자 유치도 이뤄지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방산 인프라가 약한 동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해외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EU는 이들 국가에 대한 지원도 포함하고 있으나, 실질적인 내수 전환은 더딘 상황이다.

“국방은 자립, 조달은 의존”…딜레마 깊어진 유럽

궁극적으로 유럽은 미국과의 군사적 독립을 원하지만, 당장의 안보 현실과 산업 역량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프랑스가 유텔샛 위성통신에 직접 투자하며 스타링크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튀르키예가 SAMP/T 방공체계를 도입하려는 것도 그 흐름 위에 있다.

그러나 F-35 프로그램 퇴출, S-400 제재 등에서 보듯 미국과의 이해 충돌은 여전히 잠복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추가 예산은 미국 무기에 쓰이길 바란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유럽의 자립 의지를 공공연히 압박하고 있다.

이제 방위산업은 단순한 안보 이슈가 아니다. 이는 지정학과 산업, 경제와 무역이 맞물린 전장의 산업이며, 산업의 전장이다. 유럽의 딜레마는 깊어졌지만, 한국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시장과 협력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