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석유화학업계 사업재편 자율협약식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본업만으론 답 안 나오는 정유업
국내 정유업계는 석유 정제만으로는 더 이상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국제유가 변동성이 확대되고 탄소중립 압력이 높아지면서 전통 정유업은 변동성이 큰 사업 구조로 자리잡았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 등 주요 정유사들은 최근 분기 실적에서 정유 부문이 흔들리는 반면, 석유화학·신재생 부문이 손익 방어에 기여하는 양상이 뚜렷하다. 업계 관계자는 “정유업 단일 포트폴리오로는 기업 가치를 지탱하기 어렵다”며 “저탄소·친환경 신사업은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라고 말했다
■ GS칼텍스, SAF·화이트바이오로 포트폴리오 전환
GS칼텍스는 울산 사업장에 감압 잔사유 탈황설비(VRDS)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지속가능항공연료(SAF) 관련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특히 포스코인터내셔널과 인도네시아에 건설 중인 바이오원료 정제 시설은 3분기 완공을 앞두고 있으며 가동 시 연간 50만 톤 규모의 바이오 원료와 식용유지를 생산해 SAF와 선박용 바이오연료(BMF) 제조가 가능하다.
이와 더불어 GS칼텍스는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수소, 폐플라스틱 리사이클링 등 저탄소 신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화이트바이오 사업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자체 브랜드 ‘그린다이올’을 통해 친환경 원료를 국내외 화장품 업체에 공급하며,농업·산업용 소재로도 시장을 넓히고 있다.
지난 8일 열린 GS그룹 제4회 해커톤에서 허태수 회장은 “정유·가스·석유화학 등 본업과 생성형 AI가 결합해야 GS그룹이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합’은 정유사에게도 낯선 단어가 아니며 본업과 디지털 신기술, 신에너지 분야의 융합이 GS칼텍스의 체질 개선 핵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허태수 GS그룹 회장이 8일 서울 강남구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열린 '제4회 GS그룹 해커톤'에서 참가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GS그룹)
■ HD현대오일뱅크, 초저유황 바이오 선박유로 글로벌 진출
HD현대오일뱅크는 초저유황 바이오선박유 사업을 전면에 내세우며 글로벌 해운시장의 탈탄소화 흐름에 올라탔다. 자사가 생산한 초저유황중유와 국내업체의 바이오디젤을 블렌딩해 친환경 선박 연료를 생산, 지난해 7월 국제무역선에 판매한 데 이어 대만 양밍해운에도 수출을 성공시켰다.
정부의 규제혁신도 힘이 됐다. 관세청과 산업통상자원부가 2024년 1월 종합보세구역 내 석유제품 블렌딩을 허용하면서 국내 정유사들도 고부가가치 바이오 연료를 생산·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HD현대오일뱅크는 연간 40만 톤 규모, 약 4000억 원 상당의 수출 목표를 제시하며 글로벌 해운사로 판로를 확대하고 있다.
IMO(국제해사기구)의 2050년 탄소중립 목표에 맞춰, 바이오선박유는 기존 선박 개조 없이 도입 가능한 친환경 연료로 부각된다. HD현대오일뱅크는 이를 신사업 포트폴리오에 포함하며, 해운 탈탄소 전환의 선도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계획이다.
■ SK이노베이션, 배터리·LNG·신재생으로 ‘토탈 에너지’ 기업화
SK이노베이션은 ‘탈석유’ 전략의 속도가 가장 빠르다. 전기차 배터리 자회사 SK온과 윤활유 사업을 맡던 SK엔무브를 합병해 전동화 중심의 에너지 기업으로 재편에 나섰다. 합병과 동시에 총 8조원 규모의 자본 확충을 단행하며, 재무구조 안정화와 전동화 사업 확장을 병행했다.
여기에 LNG 밸류체인, 해상풍력발전, 에너지저장장치(ESS), 소형모듈원자로(SMR)까지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EBITDA 개선을 통해 차입금을 약 6000억 원 줄였으며 손익 변동성을 완화하는 효과를 거뒀다. 그룹 차원의 경영전략회의에서는 SK이노베이션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민간 최대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키운다는 목표도 공식화했다.
■ 탈석유는 생존, 속도와 자본이 변수
정유업계의 전환은 단순히 새로운 사업을 늘리는 차원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전략이다. 글로벌 규제 환경은 갈수록 엄격해지고, 석유 수요 정체는 장기화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환에는 막대한 자본과 시간이 소요되며,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며 “투자 리스크 관리와 시장 수요 창출이 병행되지 않으면, 이종결합은 오히려 기업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