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 축소와 정책 규제, 안전 문제 해결이 시급한 올해 한국 건설업계 현장. 그 현장에 '모듈러 건축'이 새로운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정비사업이 주를 이루는 국내 건설 공급에서도 '대수선 리모델링' 등 틈새 시장을 노린 전략이 등장했다. 건설업계의 새로운 판을 살펴본다. - 편집자주

현대건설의 대수선 사업을 통해 개선되는 노후 아파트 커뮤니티 투시도 (사진=현대건설)

"재건축을 한다 해도 수년은 걸리고, 그때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지금 집을 신축처럼 고쳐 사는 게 낫죠."

서울에서는 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일부 입주민들은 나이가 들어 이사조차 쉽지 않은 데다 재건축이 이뤄져도 정작 혜택을 누리지 못할까 걱정하는 경우가 있다. 또 용적률 문제 등으로 재건축 자체가 어려운 단지도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근 정비시장에서는 '이주 없는 대수선·리모델링' 수요가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1990년 이후 준공된 아파트 상당수가 이미 용적률 400%에 근접해 신규 분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토지비를 제외한 사업비에서 공사비가 65~75%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분양 수익만으로는 공사비 상승을 감당하기 어렵다. 실제로 조합원 분담금 폭증으로 사업이 표류하거나 해제되는 재건축 단지도 있다.

정부도 이를 인식해 9·7 주택공급 대책에서 리모델링을 재건축의 대안으로 공식화했다. 이에 용적률·건폐율 완화, 리모델링 특별법 제정, 시공 가이드라인 마련 등이 포함됐다. 서울시는 전자총회와 인허가 절차 단축와 리모델링 금융지원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 현대건설, 삼성동 힐스테이트 '대수선' 새 모델 제시

현대건설은 대수선 사업을 하나의 신사업으로 꼽고 올해 상반기 말부터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준공 18년 차인 '삼성동 힐스테이트2단지(926세대)'와 대수선 협약을 체결했다.

이 단지는 이미 용적률이 273%, 층수 최고 22층으로 증축 여력이 거의 없었다. 조합원들은 "재건축 실익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신축급으로 고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입주자대표회의 주도로 67% 동의율을 확보했다.

현대건설의 대수선 계획은 지하주차장 배관 교체·누수 해결, 전기차 화재 방지 설비, 스마트 출입 통제 및 주차 시스템, 외벽·조경·커뮤니티 개선 등 공용부 중심이다. 개별 세대에는 고성능 창호, 층간소음 저감재, 에너지 절감형 설비가 적용된다.

대수선의 장점은 이주 없이 1년 내 공사 완료가 가능하다는 점.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은 통상 3년 이상 걸리며 전면 이주가 필요하지만, 대수선은 입주민이 거주한 채 진행된다.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조합 설립도 필요 없고 입주자대표회의 동의만으로 추진할 수 있어 절차 부담도 적다. 다만 분양 수익이 없고 소유주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한계는 있다. 현대건설은 장기수선충당금 활용과 PF 알선으로 자금 부담을 완화해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재건축 연한과 안전진단 통과 요건이나 용적률 제한 등 각종 규제와 높은 분담금 등으로 기존 정비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단지에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미래형 리모델링 내세운 삼성물산…첨단 기술로 차별화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넥스트 리모델링'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지난해 말 '서초래미안(1129세대)'을 비롯해 개포·목동·분당 등 2000년대 초중반 준공 단지 12곳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골조 해체와 대규모 철거 없이도 신축 아파트 수준의 외관·기능을 구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 삼성물산이 이 아파트들에 계획한 리모델링 부분은 에너지 절감형 외장재, AI·로봇 기반 주차 솔루션, 로봇 전용 엘리베이터, 층간소음 저감재, 골조결합형 공간 확장 모듈, 스마트 주거 플랫폼 '홈닉'을 핵심 솔루션으로 내세운다.

예컨대 AI 주차 솔루션과 로봇 전용 엘리베이터는 입주민 편의를 크게 개선할 수 있다. 골조결합형 확장 모듈은 세대 간 가변형 평면을 가능케 한다.

삼성물산 넥스트 리모델링 예시도 이미지 (사진=삼성물산)

기존 리모델링이 수평·수직 증축, 기초보강, 지하 굴착 등 토목공정을 포함해 평균 3~4년이 소요되는 반면, 넥스트 리모델링은 2년 이내 완공이 가능하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2000년대 이후 준공 단지들은 대부분 고용적률이라 재건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넥스트 리모델링은 입주민 생활 불편을 최소화하면서 자산 가치를 높이는 해법"이라고 설명했다.

■ 포스코이앤씨·GS건설·롯데건설·대우건설, 기술력 경쟁

리모델링은 다른 건설사들도 많이 추진하고 있다. 포스코이앤씨의 경우는 국내 최초 잠실 더샵 루벤(15층→18층) 수직증축 리모델링으로 업계를 선도했다.

포스코이앤씨는 그룹사 포스코의 초고강도 강재 포스맥과 실시간 구조 계측 시스템을 도입해 안전성을 확보했다. 이후 이수 극동·우성2·3차(3987세대, 공사비 약 2조원) 통합 리모델링을 수주하며 대단지 리모델링 강자로 떠올랐다.

포스코이앤씨 국내 최초 수직증축 준공 단지 '잠실 더샵 루벤' (사진=포스코이앤씨)

GS건설은 모든 리모델링 현장에 BIM(빌딩정보모델링) 설계를 적용해 설비와 구조 충돌을 사전 차단하고 내진보강을 표준화해 안정성을 강화하고 있다. 사례로는 청담건영아파트와 대치현대아파트, 송파 삼전현대 등이다. 이들 아파트들에는 복층 평면·친환경 단열재·커뮤니티 특화 설계를 통해 상품성을 끌어올렸다.

롯데건설은 3D 스캔·빅데이터 기반 구조 분석으로 노후 아파트의 안전성을 진단한다. 이촌동 현대아파트 리모델링에선 하이엔드 브랜드 '르엘'을 적용해 스카이카페·수영장 등 프리미엄 커뮤니티를 결합했다. 수원 권선 삼천리2차에는 '메가프레임' 커튼월룩 외관과 최신 IoT 보안·출입 시스템을 도입했다.

대우건설은 계단식·복도식 등 특화 평면 4종을 자체 개발하고 노후 단지 맞춤형으로 적용한다. 세대분리형 옵션과 고강도 구조보강 기술을 활용해 입주민 맞춤형 리모델링을 제공하고, 이주나 철거 없는 저비용, 신속 시공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대우건설 계단식 관통형 리모델링 특화평면 (사진=대우건설)


■ 중견·중소사, 속도·맞춤형으로 틈새 공략

대형사들이 브랜드와 기술로 대규모 단지를 겨냥한다면 중견·중소사들은 속도와 실속으로 리모델링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

쌍용건설은 '리모델링 명가'로 불린다. 서울 송파 문정 건영아파트와 분당 한솔마을 등에서 엘리베이터 증설, 배관 교체, 커뮤니티 확충을 추진하며 실적을 쌓았다. 리모델링 전담팀을 두고 맞춤형 설계와 시공 경험을 축적한 덕에 입주민 만족도가 높다는 평가다.

반도건설은 소규모·가로주택 중심의 대수선에 특화됐다. 일부 단지는 공사 기간을 6개월 내외로 단축했고 주민 분담금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짧게, 싸게, 필요한 만큼'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부산·울산 지역 소규모 단지에서 초단기 리모델링 모델을 다수 성공시킨 경험이 있다.

KCC건설과 우방건설은 LH·지자체와 협력해 공공임대주택 리모델링과 노후 학교 시설 개선 사업을 확대 중이다. 예컨대 대구 북구의 공공임대 리모델링 프로젝트에서는 장기수선충당금 활용과 금융 패키지를 결합하고 공공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했다.

■ 정비사업의 새 표준과 향후 전망

전국 아파트 1263만 가구 중 약 600만 가구(47%)가 준공 20년 이상 노후 단지다. 고용적률로 재건축 사업성이 봉쇄된 지역이 늘면서 업계와 정부 모두 대수선과 리모델링을 차세대 정비사업의 해법으로 보고 있다.

국토연구원과 업계 자료에 따르면 국내 리모델링 시장 규모는 지난 2023년 약 15조원 수준에서 2030년 25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연평균 6~7%의 안정적 성장세로 특히 수도권 노후 대단지와 공공임대 리모델링 수요가 주도할 전망이다.

이민재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오는 2027년까지 대형 건설사의 리모델링과 대수선 사업 비중이 기업의 포트폴리오 안정성을 높이고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을 뒷받침할 것"이라며 "재건축 규제와 PF 리스크가 계속되는 시장 환경에서 실수요, 맞춤형 리모델링은 건설사의 영업이익률과 기업가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