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수동 소재 삼표 레미콘 공장 부지 2022년 철거 전 모습. (사진=서울시)
"기피시설이란 이유로 대체지도 지원받지 못하고 철거하라고 해요. 3기 신도시든 정비사업 활성화가 되면 공사현장과 가까운 곳에 (레미콘) 공급이 이뤄져야 하는데, 사실상 공백인 거죠."
서울 도심의 레미콘 공급망이 무너지고 있다. 삼표그룹이 성수동 레미콘 공장을 2022년 철거한 데 이어, 송파구 풍납동 공장도 올해 말 가동을 멈춘다. 도심 재개발·재건축 현장에 안정적으로 자재를 공급하던 두 핵심 거점이 사라지면서 서울의 정비사업 현장들은 자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음을, 최근 시멘트·레미콘 업계 관계자의 말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삼표의 시멘트 생산기지는 강원도 삼척에 위치한 대규모 공장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시멘트는 전국 각지의 레미콘 공장으로 운송된다. 반면 레미콘 공장은 도시 인근 현장 가까이에 자리해야 하는 산업시설이다. 서울 시내에 있었던 공장들은 모두 '레미콘 배합공장'으로, 시멘트를 공급받아 현장에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레미콘을 만드는 도심형 생산 거점 역할을 해왔다.
업계 관계자는 "레미콘은 제조 후 90분 안에 현장에 도착해야 품질이 유지되지만 이제 대부분의 현장이 인천이나 광명, 의정부 등 외곽 공급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수도권 공급 외친 정부…정비사업 수요 폭증 앞뒀지만 레미콘 공급망 공백 우려
현재 서울 도심 내에서 레미콘을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기지는 천마콘크리트 세곡공장과 신일씨엠 장지공장 두 곳뿐. 한국레미콘공업협회에 따르면, 서울 내 레미콘 공장은 2020년 10곳에서 2024년 4곳으로 줄었으며 올해는 사실상 두 곳만 남은 상태다.
송파구 풍납동 삼표공장은 올해 12월까지 운영을 종료하고 부지를 서울시와 송파구에 자진 인도하기로 확정됐다. 2023년 법원의 화해 권고 결정에 따라 삼표산업이 자진 이전에 합의한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올해 서울 내 노후 건축물 수는 전년 대비 61.2% 증가하고, 도시정비사업에 필요한 레미콘 수요는 서울 전체 생산량의 91.9%에 이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비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공급 기반이 빠르게 줄어드는 구조다.
이에 따라 서울의 연간 레미콘 생산량은 600만㎥ 이하 수준으로 축소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공급거점이 줄어들면 자재 운송거리 증가, 납기 지연, 품질 저하, 추가 비용 부담이 불가피하다"며 "서울 정비사업의 속도는 결국 자재 공급망 확보력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삼표의 체질 개선 나서…친환경 시멘트 출시·부동산 개발임대 신사업 준비
삼표그룹은 건설경기 침체로 인한 시멘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사업 구조 재편과 신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표산업의 매출 중 약 90% 이상이 시멘트·레미콘 등 건설소재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시멘트와 레미콘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기 위해, 삼표그룹은 친환경·로봇·부동산 개발 등 비건설소재 영역으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이 과정에서 친환경 시멘트 '블루멘트(BlueMent)'를 출시해 ESG 경영 인증을 획득했고,
2022년에는 로봇주차 기술기업 셈페르엠(Semper M)과 합작해 에스피앤모빌리티를 설립하며 신사업 발굴에 나섰다. 다만 지난 10월 말 삼표산업은 에스피앤모빌리티의 지분을 매각하며 사실상 주차로봇 사업에서 철수했다. 이는 실적 부진과 투자 효율성 재검토에 따른 결정이다.
삼표그룹은 향후 핵심 사업역량을 건설소재·친환경 기술·부동산 개발 중심으로 재편할 계획이다. 이에 서울 성수동 레미콘 공장 부지는 현재 지상 77층 규모의 복합단지 개발사업으로 전환돼 추진 중이다. 이 부지는 업무와 주거, 숙박, 상업시설이 결합된 초고층 복합개발로 조성될 예정이다.
삼표그룹 관계자는 "장기 임대 중심의 수익형 부동산개발 사업을 신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 기피시설 낙인…대체지조차 없는 '쫓겨나는 공급망'
업황도 어려운 상황이다. 증권가에서는 시멘트 업황 둔화가 단기간에 개선되기 어렵다고 진단하고 있다.
하나증권 김승준 연구원은 "올해 1분기 국내 주요 시멘트 7개사의 합산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20.5% 감소, 영업이익률은 9.0%p 하락했다"며 "착공 감소와 고정비 부담, 전기료 인상이 수익성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2025년 1분기 시멘트사 전사 실적 비교표. (자료=하나증권)
레미콘 부문도 4개 주요 업체의 합산 매출이 27.5% 감소하고, 생산량은 24.4% 줄어드는 등 역성장이 이어졌다. 김 연구원은 "올해 상반기 내내 출하량 감소 추세가 지속돼 업황 회복은 지연될 가능성인 커, 건자재 업종 전반의 실적 감소세가 연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급 기반이 줄어든 상황에서 업황 부진이 길어지면 건설 경기 전체의 회복도 지연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정비사업 촉진만 외칠 게 아니라 공급 인프라 유지를 위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토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