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로부터) HD현대 정기선 회장, GS그룹 허세홍 부회장, LS그룹 구동휘 사장 (사진= 각 사)

■ 세대교체로 정리된 2인자들…차세대 오너 등장

주요 그룹 2인자로 평가받던 부회장들이 잇따라 퇴진했다. 2026년 인사에서 위기 대응의 최전선에 섰던 전문 경영인들이 칼바람을 피하지 못한 반면, 오너가는 초고속 승진과 전면 배치를 이어가는 상반된 풍경이 연출됐다.

글로벌 공급망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고금리·고환율 속 경기 침체는 장기전 양상이다. 이 같은 환경에서 기업들은 더 이상 외형 확장이나 공격적 투자에 나서기보다 사업 재편과 구조조정, 선택과 집중을 통한 슬림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정리 대상이 된 존재가 전문경영인 출신 부회장들이다. 성장 국면에서 조정자와 실행자로 기능하던 2인자 모델은 실패 비용이 커진 지금의 환경에서는 오히려 의사결정 지연과 책임 분산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전문경영인은 안정적 운영에는 강점이 있지만 대규모 사업 재편이나 인력·설비 구조조정처럼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한 결정을 밀어붙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오너가가 전면에 배치되거나 차세대 오너가 핵심 사업의 의사결정 축으로 이동했다.

■ HD현대·GS·LS…오너 복귀의 공통된 메시지 ‘책임’

HD현대는 이번 인사를 통해 정기선 회장 체제를 공식화했다. 조선·해양, 에너지, 기계, 방산으로 이어지는 복합 포트폴리오에서 미국과의 조선 협력, 친환경 전환, 방산 확대라는 고난도 과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GS그룹은 허용수 GS에너지 사장과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키며 에너지·정유 핵심 사업에 오너 책임을 집중시켰다. 정유·석유화학 업황 부진과 에너지 전환이 겹친 국면에서 권한보다 책임을 먼저 부여한 인사다.

호반그룹은 김민성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며 전략 수립과 신사업을 맡겼고, HDC그룹은 정원선 상무보를 디지털 전환 조직 수장으로 배치했다. 불황 장기화 국면에서 차세대 오너에게 구조 조정과 포트폴리오 재편을 직접 맡기는 흐름이다.

LS그룹은 주요 계열사 CEO를 유임하며 조직 안정을 택하는 동시에 구동휘 LS MnM 대표를 사장으로 승진시켜 자원·소재 핵심 사업에 오너 책임을 실었다. 급격한 변화보다 ‘실패를 통제할 수 있는 구조’를 우선한 인사다.

■ ‘확장’이 아닌 ‘방어’…불황이 만든 선택

이번 오너 귀환은 권한 확대가 아니라 책임 집중에 가깝다. 오너들의 취임사에서도 예전처럼장기 비전과 외형 성장보다 현금 흐름, 원가, 안전, 리스크 관리가 먼저 언급된다. 이는 오너 개인의 성향 변화라기보다 산업 환경이 요구하는 역할 변화에 가깝다.

과거에는 성장을 통해 실수를 만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 번의 판단 오류가 기업 가치 전반을 흔든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누가 더 잘 키울 수 있느냐’보다 ‘누가 실패의 책임을 질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경영 체제를 재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