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SM C&C 제공)
[뷰어스=이소연 기자] ‘어른 멜로’란 무엇일까. 최근 들어 새로 생겨난 단어의 조합이다. 풋풋한 첫사랑을 그린 학원물과는 반대의 의미다. ‘어른’이라는 표현처럼 서툴기보다 절절하고 노련한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역시 첫 방송 전부터 ‘어른 멜로’라는 수식어로 작품을 홍보했다. 그런데 드라마는 여기에 하나 더 붙여 ‘리얼 어른 멜로’라고 했다. 어차피 대부분 다 어른들의 이야기인데, 진짜 어른 멜로란 무엇일까.
보통 ‘어른 멜로’라 불리는 작품들은 진하고 농염하며 보다 직접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미 흔해진 표현법이 주는 가벼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전파를 탄 ‘키스 먼저 할까요’는 자신들의 말 그대로를 증명하고 있다.
각각의 캐릭터와 이들이 이끌어 나가는 이야기는 단순히 중년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의 마음은 세월을 따라 구르고 굴러 다치고 헤졌지만, 그랬기 때문에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
(사진=SM C&C 제공)
■ 손무한·안순진, 이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
주인공 손무한(감우성)과 안순진(김선아)의 첫 만남이었던 소개팅 자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용하다. 두 사람이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방식을 극명한 대비로 보여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안순진은 손무한을 예의 없는 변태로 오해해 모진 말들을 직설적으로 쏘아 붙인다. 손무한은 이를 듣고 있으면서도 사정을 설명하지도,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답답해 죽을 노릇이었다. 뻔히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해명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두 사람의 소통 방식은 일종의 방어기제다. 안순진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 설사 본인이 상대방을 오해를 했더라도 그것이 거짓일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명할 틈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태도는 자기 자신만 믿겠다는 심리를 대변한다. 속마음과 다른 말들을 내뱉어 놓고는 뒤돌아 고심하는 모습은 안순진의 여린 부분이다.
손무한은 안순진과 반대로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차피 말을 한들 상대방이 다 이해하지 못 할 것이라고, 오히려 설명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더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안순진이 스스로에게 투명 막을 씌운 채 부딪힌다면 손무한은 아예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겉으로는 의연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회피다.
(사진=SM C&C 제공)
■ 서로 다른 말, 하지만 결국엔 같은 말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 다가오든지 말든지’의 자세라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에 대해 이것저것 말을 해대는 환경에 노출되는 걸 극도로 꺼린다. 왜일까? 그만큼 시끄러운 세상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내면과 다르게 나오는 태도는 상처로부터 비롯된다. 폭풍 같은 일들을 맞이해본 사람은 섣불리 진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가리기 시작한다.
안순진은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보내온 친구이자 남편이었던 은경수(오지호)를 동료 백지민(박시연)에게 뺏겼다. 애지중지하던 딸아이도 세상을 떠났다. 이혼 과정에서 돈까지 날려 빚쟁이에 시달린다. 심지어 자신보다 먼저 승진한 백지민에게 모욕적인 일도 당했으며, 20년 근무를 채우지 못 한 채 파면 당한다.
손무한은 아내가 바람이 나 미국으로 떠나는 일을 겪었다. 그 때문에 딸 손이든(정다빈)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나마 삶의 버팀목이자 가족이었던 반려견 별이는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자신마저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사진=SM C&C 제공)
■ 침묵은 또 하나의 대화방식
이처럼 극과 극의 태도를 지닌 두 사람인데, 이들은 오히려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한다. 심지어 서로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산다는 것도, 안순진과 싸움을 벌인 주인공이 손무한의 딸이라는 것도, 별이가 손무한에게 각별한 존재라는 것도 모두 오해를 통해 알게 된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과정에는 자신을 이해해달라는 제스처나 말 따위는 없다. 그저 서로를 지켜보고 다가설 뿐이다. 사실 손무한과 안순진은 소개팅 자리가 마련되기 전 이미 마주친 적이 있는 인연인데, 그 때들도 그랬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차라리 죽기를 바랄 때도, 동물원 열차를 타고 슬픈 투어를 할 때도, 무덤 앞에서 각자의 상실에 눈물을 흘릴 때도 이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손무한과 안순진의 침묵은 텔레파시나 운명 따위의 것이 아니다. 차마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베인 상처를 지닌 손무한과 안순진은 각자의 영역을 조심스럽게 대하곤 건들지 않는 것뿐이다. 이들은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안고 살아가는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왜 그랬어?” “무슨 일이야?”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기에 두 사람은 점차 서로에게 스며들 듯 기대고 진심을 나눌 수 있었다.
(사진=SM C&C 제공)
■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 살아남는 ‘어른 멜로’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다. 손무한과 안순진은 여전히 어느 한 구석 불안을 안고 산다. 손무한은 진득하게 관찰하고 지켜본 다음 확신이 섰을 때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신중한 사람이다. 심지어 안순진에 마음이 가는 걸 느끼면서도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중에야 “당신을 사랑해볼까 해요”라고 말한다. 말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나 감정을 고백했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크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하겠다’가 아닌 ‘해볼까 한다’는 표현을 썼다.
안순진은 손무한과 어느 정도 신뢰관계를 쌓았음에도 자신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비밀로 부친다. 마트 캐셔로 일하면서 강사직으로 취직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집이 압류당해 쫓겨나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 아파트에 사는 척을 했다.
제 아무리 동질감을 느낄 만큼 상황이 비슷한 사람들이여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니 말이 없는 남자 그리고 가짜를 말하는 여자, 두 사람 사이에 겉으로 보이는 소통의 물결은 없다.
대신 손무한과 안순진의 간극에는 서로의 방어기제를 서서히 허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침묵이 존재한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은 갖은 오해와 상처를 지나쳐 결혼까지 이르게 됐다. 물론 이들의 앞날에는 손무한의 시한부와 안순진 딸의 죽음과 얽힌 손무한의 과거 등 또 다른 폭풍이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악연 같은 인연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침묵이 나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서로의 불완전한 부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채워주는데 의미가 있다. 인연을 뛰어 넘어 서로를 살아가게 만들고 버티게 하는 인류애에 가까운 사랑, 진짜 어른 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