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6일, 참 보기 드문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국회계기준원(KAI)이 정기 포럼을 진행했는데, 삼성이라는 특정 기업군을 콕 집어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포럼 개최 전에는 ‘공적 기능을 부여받은 사단법인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막상 현장 취재를 해보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이 보였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이한상 KAI 원장이 포럼 당일 발표한 파워포인트 내용 중 일부(자료=한국회계기준원)
“대한민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습니다.”
2020년 5월 6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이 발표한 ‘대국민 사과문’의 맺음말입니다. 그해 2월 출범한 삼성준법감시위원회(이하 준감위)의 권고에 따라 이 회장이 직접 낭독한 이 사과문은 ‘매우 진솔하고 진정성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동안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경영권 4세 승계 포기’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준법을 다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이를 위해 ‘본인과 관련된 재판이 끝난 이후에도 준감위의 독립적·지속적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국민 사과문 발표 이후 삼성을 향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은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10조원이 넘는 전대미문의 천문학적인 상속세를 군말 없이 묵묵히 납부하고, 국보급 문화재와 미술품을 조건 없이 기증해 누구나 향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무노조 경영을 폐기한 데 이어 그룹과 무관한 중소기업에까지 기술을 지원하며 동반성장에 앞장서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 정도면 불법 승계 논란에도 불구하고 3세 경영은 인정하고, 이왕지사 인정할 바에 제대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글로벌 경쟁에 걸림돌로 작용 중인 각종 규제를 없애거나 완화해 줘야 한다는 여론까지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한국회계기준원(KAI)이 지난 16일 개최한 ‘삼성생명 포럼’을 취재하고 난 후 강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과연 삼성그룹이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의문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서초동 사옥에서 경영권 승계와 노조 문제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기 전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2020.5.6(자료=연합뉴스)
■ 독립성 생명인 외부감사인, 회계도우미 전락
포럼의 주요 쟁점은 삼성생명의 일탈회계 처리와 자회사(삼성화재) 지분법 적용 여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눈길을 끈 장면이 있었습니다. 앞서 2회에서 살펴봤던 ‘스탠딩 배너’ 문제와 관련해 삼성생명 회계책임자가 외부감사인들에게 책임을 추궁한 부분입니다. 이한상 KAI 원장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삼성생명을 출입했던 회계사들을 다 불러서 ‘이 사진 본 적 있냐, 이 사진 니가 찍었냐, 혹시 이거 니가 반출한 거냐’라고 피조사자가 독립성이 제일인 감사인들을 불러 취조성으로 사실 확인을 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히죠.”
회사와 감사인의 관계는 원론적으로 수평관계가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일감을 주는 측과 받는 측의 관계가 기계적으로 수평적이긴 힘듭니다. 취재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저도 그런 ‘갑을 관계’에는 익숙합니다만, 이 원장이 언급한 것처럼 ‘불러서 추궁을 하는 수준’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기울어져도 이만저만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외부감사인의 독립성 훼손은 곧 자본시장의 신뢰도 추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투자자는 외부감사인을 믿고 투자를 결정합니다. 외부감사인이 독립성을 잃고 회사와 한몸이 돼 회사가 원하는 대로 회계를 처리하면 그 회계는 신뢰를 잃고 종국에는 투자자에게 손실을 입힙니다. 회사가 원하는 대로 회계를 처리할 거면 굳이 외부감사인을 둘 필요도 없겠죠. 내부 회계팀이 직접 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굳이 따로 비용을 들여 외부감사인 제도를 운영하는 이유는 회사의 분식회계 유혹이나 압박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서입니다.
도로 없이는 자동차가 질주할 수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회계는 자본주의 지탱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고, 외부감사인의 독립성을 통해 발현됩니다. 그래서 외부감사인은 투자자를 위한 ‘자본시장의 파수꾼’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현실은 파수꾼이 아니라 ‘도우미’입니다. 이한상 원장은 “회계적 이익조정에 혈안이 된 염치없는 보험업계와 돈만 받으면 뭐든 하겠다는 회계사들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회사는 주주와 계약자, 정보 이용자가 아닌 재벌 총수 1인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답정너’ 회계처리를 하고 있고, 감사인은 투자자를 위한 바른 회계가 아닌 회사의 이익 조정에 복무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탄합니다.
그 결과 ‘2025 IMD 국가경쟁력 보고서’에서 한국의 회계 투명성은 69개국 중 60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021년 반짝 37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지난 10년 동안 줄곧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회계 투명성이 바닥인데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가동한다고 ‘코스피 5000’ 시대가 열릴까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모르긴 해도 사상누각이요, 희망고문으로 보입니다. 삼성의 밸류업 노력이 나라 전체 밸류업을 갉아 먹는 희한한 형국입니다.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의 보험회계 TRG(전문가그룹) 위원을 역임한 박정혁 KAI 연구위원은 새로운 회계제도가 시행된 2023년부터 최근까지 IASB 위원장으로부터 세 번이나 강한 우려의 의견을 전달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의 보험회사들이 계약자지분조정을 유지하는 것은 순수한 IFRS(국제회계기준)로 인정받기 어렵고, 고로 한국은 IFRS ‘완전도입 국가’가 아니라 ‘부분도입 국가’로 봐야 한다는 우려였습니다. 회계투명성 60위는 이런 IASB의 우려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감위) 위원장이 22일 오전 서울 삼성생명 서초사옥에서 열리는 삼성 준감위 3기 정례 회의에 참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4.7.22(자료=연합뉴스)
■ 삼성그룹 대변인 자처하는 삼성준법감시위원회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준감위입니다. 이한상 원장은 ‘스탠딩 배너’ 사건을 접한 뒤 단순한 일탈이 아닌 위법한 행위로 보고 준감위에 진상조사와 서면 사과 등을 요청했습니다. 삼성그룹에 준법을 감시하는 별도의 조직이 있으니 법적, 행정적 충돌보다 신속하고 실효적인 문제해결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준감위는 신고 접수 후 회의를 비공개로 전환하고 관련자들에게 주의를 주는 수준의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신고인에게는 “삼성생명에 필요한 조치를 권고했고, 이에 따라 후속조치들을 시행할 예정”이라고만 밝히고 구체적인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활동할 바에야 비싼 인건비 들여 준감위를 운영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습니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은 초대 준감위는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인 ‘독립적 감시기구 역할’에 충실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찬희 변호사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현 2~3기 준감위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찬희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컨트롤타워의 재건과 이재용 회장의 등기임원 복귀를 촉구해 ‘준감위의 본분을 망각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대법원 무죄 판결 직후인 지난 23일에는 “이재용 회장이 등기임원으로 복귀해 죽을 각오로 공격적 경영을 해야 한다”며 마치 삼성의 대변인인 듯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삼성 내부나 일반인의 목소리일 순 있으나 준법을 감시하는 준감위의 목소리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 "삼성은 블랙홀...권위주의 해체 없이는 쇼맨십 불과"
독립성이 최우선인 외부감사인이 총수와 회사를 위한 회계도우미로 전락하고, 삼성 계열사들의 준법을 감시해야 할 준감위가 총수와 회사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한다면, 이재용 회장이 약속한 ‘대한민국 국격에 어울리는 새로운 삼성’은 그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한상 원장은 이를 ‘블랙홀’에 비유했습니다. 삼성그룹 근처에 가면 멀쩡한 회계 기준도 휘고, 감사인이나 전문가들도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다면서 말이죠. 블랙홀은 질량이 너무 커졌을 때 생긴다고 합니다. 블랙홀이 문제라면 질량을 줄이는 것이 해결 방향입니다.
삼성이라는 블랙홀의 중심에는 비서실(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사업지원TF)이 있습니다. 고 이병철 창업주는 그룹 비서실을 삼성만의 선진 경영기법으로 자랑스러워했지만 과연 현재도 유효한 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해 정현호 사장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서초딩 사건’이 터졌을 때 모 블로거는 이렇게 논평한 바 있습니다.
“소통은 단지 말이 오가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말이 통하려면, 그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든 공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소통은 기술이나 형식이 아니라 신뢰와 구조, 태도의 문제다. 권위구조의 해체 없이는, 껍데기만 바꾼 쇼맨십에 불과하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는 2020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법원의 권고로 설립된 독립 기구다. 삼성그룹 7개 핵심 회사와 자율적 협약을 체결하고 익명 또는 기명으로 신고를 받고 있다.(자료=삼성준법감시위원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