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부터 지금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19만 건을 돌파했다. 한 달 평균 2만여 건, 하루 평균 680여 건이 올라온 셈이다. 그 중 답변을 받은 건 고작 29건. 청와대가 모든 청원에 답을 할 수는 없기에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하다. 동시에 그 숫자가 청원 글을 올리는 이들의 간절함과 비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청원이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정도에 따라, ‘분노’라는 공감을 얼마나 일으키는지에 따라 그 주목도는 천차만별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출범한지도 약 10개월이 지났다. 이제는 ‘직접소통’이라는 이례적인 정책 아래 가려진 그늘을 살펴보아야 할 때다. -편집자주
(사진=픽사베이 제공)
[뷰어스=이소희 기자] #1. 최근 MBC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이 세월호 사고 당시 보도화면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곧바로 프로그램 폐지 청원이 올라왔고, MBC 측은 진상조사단을 꾸렸다. #2. 하루가 멀다 하고 ‘폭행’ ‘갑질’과 관련한 내용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를 오르내린다. 이는 곧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등장한다. 특히 ‘다산 신도시 실버택배 갑질 논란’은 동의 20만 명을 넘어 답변대기 청원으로 올랐다.
두 이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많은 이들의 분노가 이슈를 공론화시켰다는 것. 사람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의 슬픔이 함부로 다뤄진 것에 다같이 분통해했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끔찍함을 함께 마주했고, 비상식적인 갑질 논란에 다같이 일어섰다. 언급된 사연들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국민청원이 지닌 화제성의 중심에는 ‘분노’라는 감정이 있고, 많은 글들이 이 기조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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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 공감의 뿌리에 숨어 있는 감정
분노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단숨에 여러 청원 글을 양산해내고 그 청원의 동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린다. 최근만 해도 합정의 한 스튜디오가 불법 누드 촬영을 진행한 것과 관련해서 여론이 들끓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청원 글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20만 명에 가까운 동의를 얻었다.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정신과 전문의 최명기 원장은 국민청원을 둘러싼 분노의 방향이 사연 그 자체가 아닌 ‘약자를 부당하게 대하는 강자’를 향해있다고 봤다.
최 원장은 청원 글에 동의하는 심리에 대해 “약자에 대한 동정심의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강자에 대한 분노가 강하다. ‘약자가 이렇게 피해를 받았는데 사회가 무관심하니 도움을 달라’는 게 아니라, 약자에 피해를 입히는 기성세력과 조직에 대한 처벌을 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 원장은 “그런 측면에서 청원에 동의를 하는 행위는 청원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공감한다는 의미보다 대리만족을 느끼는 일종의 보복심리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분노를 집단 투사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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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제’여서 가능한 분노 표출, 그리고 한계
현재 국민청원은 익명제로 운영되고 있다. 섣불리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굳이 익명을 빌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국민청원 게시판도 보면 부족함과 부당함, 불합리함 등 부정적인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여의도 성모병원 뇌건강센터 나해란 교수는 “국민청원 게시판이 실명제였다면 이렇게까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익명제라는 원칙은 사람들이 더 솔직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공감의 배경 중 하나인 ‘분노’가 피어올랐다는 것이다.
나 교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분노할 만 한 글이 많이 올라온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분노’라는 감정에 공감한다는 거다”라면서 “‘슬프다’ ‘착하네’ 등의 반응으로 끝나는 감정은 단편적인 공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분노는 많은 사람이 한 번쯤 비슷한 일을 겪거나 마음에 품고 있는 일들에서 비롯된다. 데이트 폭력, 갑질 등처럼 말이다”라고 국민청원을 둘러싼 심리를 짚었다.
이런 분노를 거친 공감은 문제 제시와 해결을 위한 좋은 주춧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두운 측면이 없는 건 아니다. 감정의 일부인 ‘분노’가 청원자를 위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청원 글이 얼마나 분노(공감)를 일으키며 화제성을 모으느냐에 따라 그 중요도가 순식간에 커지고 작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곧 청와대 국민청원이 지닌 한계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