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한아름컴퍼니
배우 허성태는 송강호에게 뺨을 맞으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영화 ‘밀정’에서 일본 경찰 앞에서 정채산(이병헌 분)의 위치를 정확히 고하자 이정출(송강호 분)이 대뜸 뺨을 올렸다. 그 얼얼한 표정이 대중과 허성태가 마주한 첫 장면이었다. ‘밀정’ 이후로 허성태는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비록 역할의 비중은 넓어졌지만, 작품 속 그의 얼굴은 대체로 험상궂었다. 선의 포지션 보다는 늘 악의 위치에서 대사를 던졌다. 영화 ‘범죄도시’의 깡패도, ‘남한산성’의 용골대도, ‘꾼’의 장두칠도, ‘말모이’의 우에다도 상대에 비해 나쁜 사람이었다. 급기야 tvN ‘터널’에서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했고, 최근 MBC ‘이몽’에서는 일본경찰 미쓰우라로 나왔다. ‘악의 끝판왕’이라는 칭호가 나올 정도로 나빠 보이는 역할은 모두 섭렵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는 악의 길을 택했다. OCN ‘왓쳐’에서 그는 다시 비리 경찰 장해룡으로 나왔다.
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감정 표현을 굉장히 누르며 때로는 로봇 같은 느낌마저 주는 장해룡은 경찰 동료의 와이프를 죽였으나 죄를 받지는 않고 살아온 인물이다. 죄책감을 안고 있지만 이를 진정으로 풀어낸 적은 없는데다가 비리를 일삼는 경찰을 허성태가 연기했다.
악의 포지션이 지겨울 만도 한데 허성태는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감독님과 미팅 할 때 ‘꼭 제가 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었다”고 했다. 예측할 수 없는 강렬한 ‘왓쳐’의 대본에 그는 완전히 빠져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장해룡을 훌륭히 수행했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누가 진정한 ‘악’인지 구분이 안 되는 혼란을 만들어내는데 중심에 섰다. 걸작이란 평을 이끌어내는데 일조한 허성태를 최근 만났다. “‘왓쳐’는 새로운 경험”이었다는 허성태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결말을 몰랐던 ‘왓쳐’, 나조차도 혼돈이었다”
처음으로 감독에게 “하고 싶다”고 말한 ‘왓쳐’의 캐스팅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외모가 문제였다. 배우 한석규와 동년배로 보여야 하는데,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3살이었다. 첫 촬영 후 모든 불안이 사라졌다고 했다.
“원래는 ‘하고 싶다’고 안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말을 했죠. 선과 악 사이에서 옳고 그름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근데 감독님께서 ‘아리까리’해 하셨어요. 외모에서 나이차이가 보일까봐요. 그래서 첫 촬영 때 도치광이 ‘어린놈이 말버릇이 그게 뭐냐’라고 해요. 그러면서 좀 어리게 보일 수 있었죠. 또 실제로 그렇게 나이차이가 안 나보였어요. 걱정을 놓으시더라고요. 하하.”
‘왓쳐’의 장해룡은 감정 변화가 거의 없다. 늘 작게 말하고, 표정도 굳어있다. 상황이 순조롭든 위기가 찾아오든 늘 한결 같은 얼굴이다. 아주 미묘한 표정변화만 있을 뿐이다. 그 미묘함이 감정 표현의 전부였다. 또 하나는 허성태도 진짜 악인의 정체를 몰랐다. 촬영 중·후반부까지 몰랐다. 안길호 PD는 그 정체를 함구했다.
“정말 고민의 고민이었어요. 장해룡이 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간에 ‘도치광이 가장 나쁜 놈 아니에요?’라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그럼 안 PD님이 ‘과연 그럴까?’하고 쓱 지나가버리시는 거예요. 알려주지도 않고. 최종회를 볼 때까지 내가 맞는 연기를 한 것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이 드라마는 고민으로 시작해서 고민으로 끝났죠. 저한테도 혼돈이었어요.”
치밀하게 계산된 상황에서 연기를 해도 100% 온전할 수 없기 마련인데, 결과를 모르고 연기하는 것은 배우 개인에게도 힘들고, 제작진에 있어서는 무리수일수도 있다. 하지만 안 PD는 이 위험성을 안고 촬영에 임했다. 왜 그런 것일까.
“따로 물어보진 않았어요. 아마 서스펜스를 유지하기 위해서였겠죠. 제가 정체를 알고 연기하면 더 치우칠까봐 그러신 거 같아요. 저만 엄청 고민하고 그랬죠.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아요. 제가 13부에 안 나왔는데, 반응들을 보니까 ‘장해룡이 범인이 아닌가봐’라는 의견이 많더라고요. 그냥 돈만 밝히는 경찰로 보인 거죠. 그런 반응이 나왔다는 건 그래도 PD님의 의도가 성공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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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로봇’이라니!”
우리말로 허세라고도 하고 일본말로는 ‘후까시’라고도 하는 것이 장해룡에게 장착돼 있었다. 미세한 행동 또는 얼굴의 변화들로만 연기했다. 상황에 따라 정의로운 척, 악의 축인 척 했다고 한다. 나름의 변화들을 섞었는데, 알아주지 못한 일부 대중에 섭섭함이 있었다.
“원래 댓글을 잘 보는 편이에요. 원래 뭐 연기하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이번에는 특히 나쁜 반응에 예민했었어요. 아무래도 잘하고 싶었으니까. 유독 신경을 많이 쓰면서 연기한 것 같아요. ‘잘 하고 싶다’는 말을 해버려서. 자학도 많이 했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로봇 같다’는 평이었어요. 충격적이었어요. 저는 애매모호하게 연기하려 했는데 ‘로봇’까지 가버리니까. 한편으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 유쾌하지만은 않았어요.”
‘왓쳐’는 정의라는 단어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무엇이 진정 ‘절대선’인가. 어떤 것이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 작품에 참여한 허성태에게 ‘왓쳐’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사람의 말을 못 믿겠어요. 중·후반부부터 의심하는 성향이 생겼어요. 누가 좋은 말을 해줘도 ‘뭔가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진실을 말하는 캐릭터가 없잖아요. 여기선 이랬다가 저기선 저러고. 정의도 규정짓기 어려워요. 도치광 대사에 ‘한 번도 정의를 위해 이 일을 한 적이 없다. 옳은 일이라 생각되는 걸 했다’고 나와요. 그 옳고 그름도 사실 상대적일 수 있잖아요. 인간사에 절대적인 건 없는 것 같아요. 도치광도 나쁜 놈이죠. 증거조작 했잖아요.”
◇“악역 이미지 걱정 없었는데…”
허성태 얼굴의 주름은 왜인지 모르게 강인한 내면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그 강인함이 주로 악으로 표현돼 왔다. 악역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 두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걱정은 별로 없었어요. 저는 악역도 좋아요. 이유 있는 악역이면 더 좋고요. 안 그래도 한석규 형님이 권상우 형이 비슷한 시기에 악역 말고 다른 걸 해봐야 성장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때마침 드라마 ‘싸이코 패스 다이어리’에 캐스팅됐어요. 이건 코미디에요. 감독님이 저를 만져서 새로운 모습 보여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안 할 수가 없어요.”
도저히 안 할 수 없는 제의 때문에 허성태는 불과 2주 간격으로 새 드라마에 돌입한다. 영화 ‘귀수’ 촬영도 함께 한다. 바쁘다 못해 ‘빡센’ 스케줄이다. ‘왓쳐’로 2019년의 중반기를 보낸 허성태는 두 작품으로 올해의 마무리를 짓겠다는 생각이다.
“바빠도 안 할 수 없어서요. 그래도 일하는 맛이 있어요. 연기하는 건 행복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