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2월말 발표 예정인 정부의 기업밸류업 정책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식시장이 크게 올랐다. 최근 세계적으로 ‘핫한’ 일본 주식시장과 일본 정부의 증시부양책을 한국 정부가 벤치마킹해서 따라간다고 하니 한국 주식시장도 일본처럼 재평가될 수 있지 않겠냐는 기대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 10년 전의 일본처럼, 한국 경제도 장기간의 저성장과 부채부담으로 신음하고 있고, 한국 주식시장도 오래도록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외면 받아왔다. 상황이 비슷하면 대응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지기 쉬운 법이다. 저PBR주식에 대한 투자가 마치 전기차나 인공지능 같은 테마주 투자 열풍처럼 타오르는 요즘인데, 이런 강력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정책발표가 이뤄질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렵다. 게다가, 장기적인 한국 상장기업의 구조적 저평가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 수준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이는 국회를 거쳐야 하는 문제라 행정부의 정책 방향 발표만으로는 역부족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 주식시장 저평가에는 두 가지 근본 원인이 있다. 첫번째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뒤틀려 있어 경영자 입장에서는 주주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경영자의 주주가치 훼손으로 피해를 보는 소액주주가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각각의 원인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사실, 한국의 대주주 혹은 경영자 입장에서는 주가를 굳이 상승시킬 요인이 없다. 미국 상장기업들은 주로 이사회 중심으로 경영진을 구성하고, 이들에 대한 보상이 주가에 비례해서 이뤄진다. 이러한 이해관계로 인해 미국 기업경영의 최대 목표는 기업가치 상승이 되고 주주환원 확대에 대한 각종 수단이 동원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창업자와 그 가족들이 회사의 최대주주이자 경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 경영자는 주가가 오를 경우 스톡옵션을 행사하고 지분을 팔아 거액을 손에 쥘 수 있지만, 한국 창업자 경영진에게 주식이란 가업이고 자식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가가 오른다고 해서 주식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가가 오르면 상속/증여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만 올라갈 뿐이다.
한국의 기업 오너들은 일단 실적에 무관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그 과정에서 파생된 기회들을 대주주 본인 혹은 자식들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비상장 계열사로 이전시키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된다. 한국 주식시장에는 같은 기업집단에 속해 있는 기업들이 왜 이렇게나 많이 상장되어 있을까. 기업규모에 대한 무한확장 욕구와 사업기회를 외부로 빼돌리는 관행이 수십년간 지속돼 왔기 때문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물적분할과 모자회사 중복상장 같은 현상들도 다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대다수 국내 상장기업들의 대주주들에겐 주가를 상승시킬 경제적 이유가 없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대주주의 입장이다. 기업을 상장시킨다는 것은 자금조달을 위해 대주주가 일부 지분을 사회에 내놓은 것이고 필연적으로 소액주주가 생긴다. 상장기업에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대주주 입장에서 주가 상승 명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소액주주가 목소리를 낼 수 있거나 대주주의 잘못된 행동을 막을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광범위한 주주가치 훼손이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다.
미국 기업은 경영실적이 부진하거나 주가가 답보상태에서 머물면 주주들이 이사회를 흔들고, 곧 이사회가 경영진을 교체한다. 아이폰으로 세상을 바꾼 스티브 잡스도 한 때 이사회에 의해서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상법상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이사회를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한국 상장기업의 이사회는 대주주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거수기일 뿐 책임을 지지 않는다.
기업이 갖고 있는 여러 사업 중 미래가 기대되는 사업을 회장님 아들이 가진 회사에 헐값에 넘겼다고 치자. (수많은 국내 기업들이 자행하고 있는 전형적인 주주가치 훼손 사례다.) 소액주주 입장에서는 미래의 이익을 눈 앞에서 강탈당한 것이다. 그럼 이를 결정한 이사회 멤버들에게 소액주주들이 이사들을 배임 행위로 소송을 걸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상법에 기재된 “이사의 의무”에는 주주에 대한 의무가 빠져 있다. 이사들은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주긴 했지만 회사 전체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진술하면 법적 책임에서 해방된다.
위험을 감수하고 과감한 도전으로 기업을 일궈 고용을 창출한 창업자의 공로는 응당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간이고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되지 않을 때는 각자의 권리가 법률로 보호돼야 한다. 회사 이사회가 창업자와 그 가족들에게만 유리하고 소액주주에게는 해를 끼치는 일방적인 결정을 했다면 최소한 소액주주가 자신의 침해된 이익에 대해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게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는 것이다.
이에 대주주는 잘못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고, 소액주주는 이를 막을 수가 없다. 이 슬픈 현실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완벽한 해결은 어렵다. 다만 최소한의 법 개정만으로 큰 변화를 만들 수는 있다.
가장 간단한 건 상법 개정이다. 상법 382조 3항 이사의 의무에 “주주의 이익” 5글자만 추가해주면 된다. 이러면 이사회의 잘못된 의사결정에 소액주주가 민사소송을 걸 수 있다. 승소 여부와 관계없이 이사들은 소송제기의 가능성만으로도 주주가치 훼손을 지금처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난 20년간 이 법 개정의 필요성이 끝없이 대두됐고 여야를 막론하고 법 개정 입법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아직도 이 5글자 추가가 안되고 있다.
이처럼 상법 개정이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면, 세법 개정은 가해자들이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최소한의 조치다. 현재 한국에서 상장기업 주식을 상속/증여할 경우 최고 세율이 60%다. 또 회사에서 배당을 받을 경우 실효세율은 건강보험료 포함시 58.23%까지 증가한다. 이러한 징벌적 세율로 인해 대주주는 기업가치가 올라가면 그 중에 60%는 날라간다고 생각한다.
소득세와 상속증여세는 이렇게 높은데 반해, 양도세는 소득에 합산되지 않는 분리과세로 최고 세율이 27.5%에 불과하다. 세율이 이렇게 차이가 나면 대주주 입장에서는 주가가 올라가거나 배당을 하기보단 기회를 밖으로 빼돌려 별도의 회사를 만들고 이를 상장시키거나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면, 60%의 세율을 27.5%로 절세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최소 2배 더 이득인데 안 할 이유가 없다.
세금, 특히 세율은 국가내의 자산배분 흐름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나라 세법은 중구난방으로 복잡한 데다가 각 소득원천에 대한 세율이 무슨 근거로 결정되는지 알 수가 없다. (정치적인 근거말고 경제적인 근거 말이다.) 일관성 없는 세율을 단순화하고 누더기처럼 덧댄 공제나 중복과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병원균에 감염돼 질병에 걸렸으면, 이 병원균을 제거하는 치료를 시행하고, 그 이후부터는 자체적인 면역력과 재생력으로 병에서 낫게 된다. 인간의 신체처럼 복잡한 주식시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이 필요하다. 시장의 정상작동을 방해하는 원인을 제거해주고 그 다음부터는 다양한 시장참여자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자체적인 면역력과 재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것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현재 언급되고 있는 정책들에는 아쉽게도 병원균을 제거하는 내용이 제한적이다. 밸류업 정책 중 일부로 언급되고 있는, 저평가된 기업에 면박을 주는 정책은 감기걸린 사람한테 ‘시끄러우니 기침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병을 고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장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도 못한다.
한국 주식시장은 2024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기업실적과 밸류에이션 양면에서 잃어버린 10년을 보냈고 한국 주식은 전세계에서 가장 싼 시장이 됐다. 기저효과로 인해 올해는 기업실적도 좋아지는 국면이다. 주식시장 활성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어느정도 이뤄졌다. 바람직한 정책이 꾸준히 시행된다면, 한국 주식시장은 일본보다도 더 좋은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하지만 형식적인 정책으로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과도한 기대는 실망으로, 실망은 불신으로 연결된다. 정책이 신뢰를 상실하면 그 이후 설령 좋은 정책이 나온다한들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부디 이번 절호의 기회가 실망과 불신이 아닌, 환호와 확신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강대권 대표는 현재 라이프자산운용을 이끌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산업경제학 전공)를 마쳤고,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스믹(SMIC)'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가치투자 2세대 스타 펀드매니저인 강 대표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거쳐 유경PSG자산운용에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역임했다. 당시 국내 운용사 최연소 CIO다. 지난 2016년, 2020년 국내 주식형 운용사 수익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