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 일봉차트(키움증권 HTS 캡처)


민주당이 3차 상법 개정안(자사주 의무소각)을 추진 중인 가운데 상장사들이 ‘막차를 타자’는 심리로 자사주 처분을 서두르고 있다. 증권사와 사모펀드들은 이를 기회 삼아 앞다퉈 딜을 제안한다. 자사주를 기초로 한 EB(교환사채) 발행 건수는 이미 작년 한 해 발행 규모의 두 배에 달하며, 총액은 3조원을 넘어섰다.

문제의 본질은 규제의 비대칭성이다. 자사주 EB 발행은 특정 제3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주식이 넘어가고, 회사에 현금이 유입된다는 점에서 3자배정 유상증자와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 상법은 기존 주주 이익 침해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3자배정 유상증자에 대해 주총 특별결의 등 강한 절차적 통제를 요구한다. 하지만 최근 법원은 자사주 처분을 신주 발행이 아닌 회사 재산의 단순 처분으로 보는 판례를 남겼다. 그 결과, 경제적 효과는 같으면서도 법적 규율은 다른 기형적 상황이 만들어졌고, 자사주 EB 발행이 급격히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입법부는 이번 사례를 계기로, 아무리 선한 의도의 입법이라도 시장의 선택 구조를 왜곡할 수 있음을 감안해주면 좋겠다. 가장 시급한 보완책은 명확하다. 자사주 처분이 사실상 신주 발행과 동일한 효과를 내는 경우, 동일 규율을 적용해야 한다. 최소한 주주 희석과 지배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주총 특별결의 수준의 통제 장치로 다루거나, 기존 주주에게 신주인수권을 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업의 재무적 관점에서 EB는 분명 매력적이다. 무이자 또는 초저금리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만기 이전 현금유출이 제한적일 수 있다. 유상증자 역시 이자비용은 없다는 점에서 “저비용 조달”이라는 명분은 공유한다. 그렇다고 상장기업들이 마구잡이로 유상증자를 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차이는 ‘절차와 보호장치’다. 유상증자는 강한 주주보호 절차를 통과해야 하지만, 자사주 EB는 동일한 경제효과를 내면서도 그 절차를 우회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남발의 유인이 생기고, 시장 신뢰가 깨진다.

자사주EB의 재무적 이점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 돈으로 주주가치 희석을 능가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다만 현행 판례 체계 아래 자사주 EB 남용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도리는 필요하다. 이사회는 자사주 외의 다양한 조달 수단을 면밀히 검토하고, 왜 자사주가 최선인지 논거를 문서화해 보고해야 한다. 자사주 처분이 불가피하다면, 주주들이 감당해야하는 비용으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향후 계획을 밝혀야 한다. 이사회라는 존재가 회장님과 친분있는 분들이 모인 거수기로 전락한 한국에선 낯선 개념이긴 하나, 원래 이사회 결의는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니라, 주주의 합법적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지는 절차다. 검토하고, 비교하고,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사의 의무다.

최근 대규모 자사주 EB 발행을 공시해 주가 폭락을 초래한 KCC 사례는 이 문제의 상징적 사건이다. KCC는 자신들 시가총액의 1.5배 수준인 시가 4조 5000억원이 넘는 규모의 상장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회사가 사실상 대형 펀드에 가까운 재무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지난 7월에도 보유 중인 한국조선해양 지분을 기초로 약 9000억원 규모의 EB를 무이자로 발행했고, 여전히 3조 6000억원 상당의 상장 주식이 남아 있다. 이런 특수한 재무구조와 한국조선해양 지분 활용이라는 선례를 감안하면, 자사주 이외의 자금조달 방안을 먼저 검토하는 것이 이사회의 상식적인 책무일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필자가 몸담고 있는 라이프자산운용은 자사주EB 공시 다음 날, KCC에 3조 2000억원 규모의 삼성물산 지분 활용계획 공개를 요구하는 주주서한을 보냈다. 지갑에 3조6000억원을 보유한 기업이, 왜 4000억원의 자금을 굳이 주주로부터 끌어낼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만약 KCC가 진정으로 재무구조 개선 의지가 있다면, 지난 10년간 활용하지 않았던 삼성물산 지분의 향후 계획을 주주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먼저다.

보유하고 있는 비영업자산이 시총보다 크다는 것은, 본업의 기업가치는 마이너스(-)로 시장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KCC는 본업에서 연간 5000억원 가까이 벌고 있다. 그렇다면 조단위의 주식이 무가치한 것일까? 10년째 지갑에서 꺼내지 않는 돈이니 시장에서는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번에 KCC가 자사주가 아닌 삼성물산 처분 계획을 발표했다면 없어진 줄 알았던 돈이 부활한 것이니 KCC는 주가는 반대로 올랐을 것이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요구라도 한국 주식시장에서 무시되어 온 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역사였지만, 이번만큼은 다르길 바란다. 그래야만 코스피 5000 시대도 열릴 수 있다. 2005년 9월부터 2025년 8월 말까지 S&P500 지수는 약 6배 상승했지만 시가총액은 5배 남짓 늘었다. 주식 수가 약 20% 감소하며 공급이 줄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는 3배 상승에 그쳤지만, 시가총액은 6배나 늘었다. 주식 수가 2배 증가할 정도로 공급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한국 기업들은 유상증자, 전환사채, 교환사채, 쪼개기 상장 같은 ‘비용 없는 자금조달’을 남용해 왔다. 그 자금으로 기업들은 성장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기업들이 치뤘어야 할 비용을 국내 투자자들과 국민의 노후자금인 연금이 대신 치러왔다.

상법개정이나 주주권한 강화를 얘기할 때마다 기업들은 ‘경영하기 어려워진다’라고 항변한다. 여기서 말하는 어려워지는 ‘경영’이란 본인들이 치뤄야할 비용을 투자자와 연금자산에 전가하는 경영을 말한다. 지난 20년간 그런 식의 경영을 지속한 결과, 지금의 한국 경제가 어떤 상태인지 모두 알고 있다. 골든타임을 놓쳤다, 잃어버린 10년이라 한다. 모두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데, 여전히 비용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소수가 독점하는 방식을 ‘경영’이라 불러야 하는가?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동산에 몰린 가계자산이 자본시장으로 이동하는 숨통을 열어주고, 생산적 금융을 활성화해 저성장을 벗어나고, 주식시장이 재평가돼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최근 달라진 정부의 정책 기조는 이 열망을 반영할 결과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합리적 의사결정으로 자본비용을 낮추되, 주주권 침해를 방지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강화해야 한다. 입법적으로는 자사주 처분을 신주발행에 준해 규율하고,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이사회가 본연의 견제·심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 신뢰가 회복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만성적 병폐도 완화될 수 있다.

KCC의 사례는 특정 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 사회가 재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상징적 질문이다. 그 수많은 드라마에 재벌이 주인공으로 나올 정도로 한국 사회는 재벌의 삶을 사랑한다. 한국이 단기간에 선진국이 된 것도 재벌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재벌은 늘 질시의 대상으로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이 같은 애증은 기업이 비용을 시장에 전가하는 과거의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태에서 벗어나 공동의 부를 일궈나가는 책임감있는 존재로서 기업과 재벌이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반감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느리더라도 그 방향으로 움직일 때, 모두가 조금씩 더 효율적이고 공정한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법과 절차의 정합성, 그리고 이사회의 책임 있는 판단이다.


강대권 대표는 현재 라이프자산운용을 이끌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산업경제학 전공)를 마쳤고,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스믹(SMIC)'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가치투자 2세대 스타 펀드매니저인 강 대표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거쳐 유경PSG자산운용에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역임했다. 당시 국내 운용사 최연소 CIO다. 지난 2016년, 2020년 국내 주식형 운용사 수익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