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한국 현대바둑 80주년 기념 공모전' 일러스트 작품 부문 1위 ‘함께 쌓아온 80년의 역사’(왼쪽), 2위 ‘모든 수는 바둑으로 통한다_야구장 편’ (자료=한국기원)
■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
밀레니엄을 넘어 2000년대에도 절대강자 이창호의 위용은 여전했다. 전성기를 훌쩍 넘긴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세계 바둑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며, 흔들림 없는 '돌부처'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압권은 국가대항전인 농심신라면배였다. 한국 대표로 홀로 남은 이창호는 중국과 일본 선수 5명을 연파하며 대역전극을 연출했다. 이는 훗날 ‘상하이 대첩’으로 회자되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 최택의 에피소드로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중국의 일인자 창하오 9단은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 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라는 뼈아픈 말을 남겼다.
이창호는 ‘불세출의 천재 기사’ 우칭위안(吳清源) , 조훈현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로 꼽힌다.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인간 바둑의 정점을 찍은 바둑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 정상에 오른 승부사들
알파고 광풍에 묻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을 뿐이지, 이세돌의 진가는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1995년 프로에 입단한 12살 소년. 공격적이고 창의적인 기풍, 예측할 수 없는 파격적인 묘수, 그리고 탁월한 승부 감각은 이세돌을 상징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2000년 이세돌은 파죽의 32연승을 달리며 ‘불패소년’으로 명성을 떨쳤다. 2003년 LG배 결승에서 일인자 이창호를 무너뜨리며 세계 바둑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2014년 동갑내기이자 필생의 라이벌인 중국의 구리(古力) 9단과 10억원의 상금을 걸고 <이세돌-구리 10번기>를 벌여 6-2로 완승을 거두며 세계 최고의 기사임을 만방에 알렸다.
그러나 이세돌의 승부사 인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인류에 큰 충격과 감동을 선사한 알파고와의 대결 이후, 정작 본인은 깊은 회의와 상실감에 빠졌다. 인간으로서 바둑의 한계를 실감한 그는 2019년 전격 은퇴를 선언하며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2012년 영재입단대회에서 첫 2000년대생 프로기사가 탄생했다. 프로 면장을 받은 앳된 얼굴의 주인공은 현존 최강 신진서. 그가 걸어온 길은 이전 세대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어릴 적부터 수만 판의 인터넷 대국을 경험한 신진서는 인공지능을 단순한 경쟁 상대로 보지 않았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답게 AI를 연구 파트너로 삼아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흡수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수를 찾아냈다. AI가 제시하는 '블루 스팟'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바둑으로 체화시킨 신진서는 지금도 완성형 기사로 성장하고 있다. ‘신공지능’이라는 닉네임은 그렇게 탄생했고,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완벽한 바둑 기사로 평가받고 있다.
2020년 신진서는 승률 88.37%를 기록하며, 32년 전 이창호가 세운 연간 최고 승률 기록을 경신했다. 2023년 한국 기사로는 14년 만에 응씨배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박정환·신민준 등과 함께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수확했다. 그리고 2024년 농심신라면배에서 나홀로 6연승을 거두며 제2의 '상하이 대첩'을 완성했다. 올해 2연승을 더해 농심배 18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여자 바둑의 재발견
한국 현대 바둑의 성장은 남자 기사들이 주도했지만, 여자 바둑 역시 2000년대 들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 전환점에는 ‘반상의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있었다. 1999년부터 12년간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동하며 국수(國手)까지 오른 그녀는 당시 약세를 면치 못했던 한국 여자바둑에 강력한 메기효과를 선사한 숨은 공로자다.
자극은 성장으로 이어졌다. '바둑 여제' 최정 9단은 삼성화재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남자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김은지 9단은 신예답지 않은 과감한 기풍으로 바둑팬들을 사로잡았다. 오유진 9단과 김채영 9단은 오청원배 등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여자 바둑의 위상을 드높였다.
여자바둑리그의 출범과 오청원배, 센코컵 등 여자 세계대회의 잇달은 론칭은 여자 기사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의 ’천재 소녀’ 나카무라 스미레(仲邑菫)가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동하는 지금, 한국 여자 바둑은 메이저리그로 자리잡았다.
■ 새로운 80년을 향하여
낭만적인 종로 관철동에서 시작된 한국 현대바둑의 역사는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며 왕십리 홍익동 시대를 거쳐왔다. 그리고 2024년 9월,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바둑전용경기장 착공식이 열렸다. 바둑 박물관, 전문 연구실, 교육장, 방송 시설 등 인프라를 두루 갖춘 이곳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닌, 한국 바둑의 성지가 될 전망이다.
1945년, 조남철 선생이 잿더미 속에서 바둑돌을 주워 담으며 꿈꿨던 세계 최고의 기원. 그 꿈은 80년이 흐른 지금,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서며 현실이 되었다. 개척자들이 뿌린 씨앗은 승부사들의 손을 거쳐 결실을 맺었고, 그 열매는 다시 새 시대의 씨앗으로 움트고 있다. 격동의 80년이 저물고, 새로운 80년이 다가오고 있다.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