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에선 배임죄 폐지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기업을 위한 과도한 특혜라며 비판하고, 다른 쪽에선 한국 경제의 구조적 전환을 위한 필수과제라고 평한다. 다만 필자로선 이 논의를 접할 때마다 법률 조문이나 정치 논리를 떠나,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오랜 시간 기업을 자문하며 마주해온 경영자들의 ‘표정’이다.
경영자들은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어하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발을 떼지 못하는 독특한 표정이 있다. 책임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 표정은 단순한 망설임은 아니다. 스스로도 쉽게 지우지 못하는 압박감 같다. 필자는 오랫동안 그 감정의 정체를 고민해 왔고, 배임죄 폐지 논의를 지켜보며 그것이 결국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한국의 배임죄는 경영자의 판단 과정에서 가장 깊은 곳을 흔드는 요소 중 하나다.
경영 판단이란 원래 정답이 없는 길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시장 불확실성은 늘 존재하고, 의사결정이 가져올 결과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불확실성을 ‘결과’로 평가한다. 성공하면 유능한 경영자, 실패하면 형사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그 책임은 민사적·경영상 책임을 넘어 곧바로 형사 리스크로 이어진다. 그러니 경영자들이 판단을 내리기보다 판단을 회피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필자는 이러한 현실이 기업의 생동감을 잃게 만드는 현장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한 중견기업 대표는 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오랜 기간 대비해 왔으나, 최종 회의에서 누군가 “실패하면 배임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꺼내니 회의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치밀한 분석과 전략으로 쌓아온 계획이 ‘형사 리스크’라는 말 한마디에 무너졌다. 결국 기업은 아무런 결정도 못했다. 그 사이 경쟁사는 과감한 시도로 시장을 선점했다. 이러한 일은 한국의 기업 현장에서 반복되는 일상이다.
배임죄는 단순한 형법 조항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경영자들로 하여금 도전 대신 회피를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화를 만든다. 실패를 학습 과정으로 보기보다 범죄의 위험으로 인식하게 하고, 정상적인 경영 판단을 ‘위험한 의사결정’으로 왜곡하며, 경영자를 ‘의사결정자’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관리자’로 바꾼다. 그 결과 기업들은 신사업, M&A, 조직개편 등 미래를 위한 전략적 선택 앞에서 종종 움츠러드는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한국 기업은 과감성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그 부족함의 원인을 개인의 성향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서 씨앗이 성장할 수 없듯, 배임죄라는 짙은 구름은 기업의 의사결정에 장기간 그림자를 드리워 왔다.
물론 배임죄 폐지에 따른 우려도 따른다. “그렇다면 부정행위는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를 방치하려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부정한 행위를 규율할 법적 장치는 충분하다. 자본시장법, 공정거래법, 상법 등 다양한 법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부정 행위의 규율’이 아니라, 선의의 경영 판단까지 범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과잉 포섭이다.
기업의 자원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용기이며, 그 용기를 꺾지 않는 사회의 신뢰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신뢰, 실패가 도전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신뢰, 그리고 실패가 배임이 아니라 학습의 출발점이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배임죄 폐지 논의는 결국 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경영자가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정답이 보장되지 않은 결정이라도 ‘최선을 다한 판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는 사회, 실패가 범죄가 아닌 경험의 일부로 기록되는 사회 말이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한국 기업은 지금보다 훨씬 멀리, 훨씬 더 과감하게 뻗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배임죄 폐지는 그 미래를 향한 첫 번째 걸음이 될 것이라 믿는다.
■ 김종선 대표는 경영학박사로, 현재 기업 경영 자문 및 밸류업 관련 전문컨설팅회사 '제이드케이파트너스'를 운영 중이다. 지난 30여년간 코스닥협회 등에서 상장회사관련 제도개선 및 상장회사 지원 업무를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초기기업부터 상장회사까지 성장 과정 전반에 관한 전문적 자문을 활발히 수행한다. 아울러 벤처 및 상장회사 관련 제도개선에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등 기업 애로사항 해소를 위한 부분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