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가 변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동안 기업들을 성장시켜준 산업군들의 정체와 함께 인공지능(AI)을 필두로 한 새로운 미래 기술들의 등장하면서 산업계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전쟁, 자국 이기주의, 기후위기 등 여느때보다 불투명한 외생변수들이 많은 시대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어렴풋하게 보이는 미래이기는 하지만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안개로 덮인 도화지에 성장동력을 그려 나가고 있다. 뷰어스는 창간 9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그리는 미래의 핵심 성장동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 편집자주
포스코는 지난 4월15일 수소 100%로 철강을 만드는 수소환원제철 기술 '하이렉스(HyREX)' 시험설비 출선(철강 쇳물을 뽑아내는일)에 성공했다. 하이렉스 시험 생산설비 모습 (사진=포스코)
“‘친환경 생산체제’로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춰야.”
철강 조선업계가 중국산 저가 물량 공세 등 위기 속에서 고부가 니치마켓(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국내 양대 철강회사는 ‘친환경 생산체제’ 전환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
■ 포스코·현대제철, ‘수소환원제철·전기로’ 추진…장인화 “압도적 경쟁력”
8일 포스코와 현대제철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포스코 철강부문 영업이익은 전년과 비슷한 수준인 3390억원을, 현대제철은 55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83.3% 줄었다. 업계 안팎에선 건설 수요 둔화와 중국 저가 공세로 업황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탄소감축 시대에 적합한 친환경 철강 생산 체제를 구축해 유럽 시장 등을 공략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한국철강협회 회장이자 포스코그룹 수장인 장인화 회장은 지난달 초 ‘철의 날’ 기념식에서 “친환경 생산체제로 조기 전환해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탄소중립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세계 친환경 철강재 시장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춰나가야 한다”고 제시했다.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도 지난달 창립 71주년 기념사에서 “각국의 무역장벽 등 철강업계의 경영환경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터널과 같다”면서 “탄소중립 로드맵 실행 강화 등 ‘지속성장이 가능한 친환경 철강사’라는 말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닌 회사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친환경 철강 생산체제 구축은 회사의 정체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포스코는 ‘수소환원제철 기술’인 ‘하이렉스(HyREX)’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는 기존 화석연료를 대신해 수소를 활용하는 기술이다. 구체적으로 철강 제품 1톤을 생산하는 데 약 2톤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되는데, 수소는 산소와 결합하면서 물을 배출하기 때문에 무탄소 철강 생산이 가능한 원리다.
포스코는 “오는 2030년까지 하이렉스 상용 기술 개발을 완료한 후 2050년까지 포항 및 광양 제철소의 기존 고로 설비를 단계적으로 수소환원제철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포스코는 수소 기술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전기를 활용한 공정으로 대체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지난 2월부터 광양제철소에는 6000억원을 들여 2025년까지 연산 250만톤 규모의 전기로를 만들고 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이 상용화될 때까지 기존 공정을 전기로로 도입해 탄소 감축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럽과 미국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구상이다. 최근 유럽연합(EU)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미국 지속가능한 철강협정(GSSA) 등 주요 선진국들의 탄소배출량에 따른 철강 관세 장벽을 넘을 수 있다. 중국의 저가 공세 속에서 친환경 생산체제로 세계 선진 시장에 고부가 제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격이다.
현대제철 신 전기로 (사진=현대제철)
현대제철도 전기로와 고로 복합 생산체제부터 구축해 저탄소화된 자동차용 고급 강재를 생산에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해 현대제철은 1단계로 기존 전기로에서 저탄소의 쇳물을 공정에 혼합 투입하는 방식을 취한다. 2단계로는 현대제철 독자기술로 만든 저탄소제품 생산체제인 ‘하이큐브(Hy-Cube)’ 기술을 적용한 전기로를 신설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40% 저감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실제로 최근 현대제철은 CBAM에 대응한 탄소저감 강판 판매기반이 성과를 보이고 있다. 최근 현대제철은 유럽 고객사들과 탄소저감 강판 판매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체코 최대 자동차 부품사 중 하나인 타웨스코와 이탈리아 자동차 강판 전문 가공 업체 ‘EUSIDER’와 협약을 맺었다.
현대제철은 현대차그룹이 구축하는 수소생태계에 참여해 그린스틸 부문에서 협업하고 있다. 이러한 친환경 생산 체제를 이뤄가며, 전기차 차량 강판 등 미래모빌리티와 해상풍력용, 친환경에너지 운송용 강재 개발 등에도 나서서 시장 점유율 확대에 나설 계획이다.
■ 조선업계도 정부와 ‘수소’ 기술 집중…중국 LNG도 따라와
수소 기술은 조선업계에서도 화두다. 조선 업계는 중국산 저가 공세 속에서 액화천연가스선박(LNG) 등 친환경 선박 중심 고부가 제품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이전에는 많은 물량확보에 집중했다면 친환경 선박 등 고부가 선별 수주에 나섰다.
하지만 최근엔 LNG선도 중국이 따라오고 있는 실정. K-조선은 더 나아가 ‘액화수소운반선’ 등 친환경 신기술 선박 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조선업계에 따르면 지난 1분기 한국 조선업계는 중국을 제치고 수주액 기준 세계 1위 자리를 3년 만에 되찾았다. 그러나 친환경선박 시장 점유율은 지난 2020년 68%에서 지난해 40.6%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친환경선박 점유율은 약 23%에서 49%로 늘었다.
조선업 기술력도 현재 EU나 미국 등에 비해 1.7년 뒤쳐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최근 정부와 조선업계는 ‘초격차 기술’ 확보를 위해 액화수소운반선, 무인자율제조 공정기술 등에 10년간 2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강경성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이 지난 2일 부산시 강서구 ‘K-조선 초격차 비전 2040’ 관련 선박 기자재업체인 파나시아를 방문해 기자재 생산공정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산업통상자원부)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일 부산에 있는 친환경 선박 기자재업체 파나시아에서 ‘K-조선 기술 얼라이언스’ 두 번째 모임을 갖고 ‘K-조선 초격차 비전 2040’을 발표했다.
앞서 얼라이언스는 지난해 12월 출범해 산업부와 조선 3사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산학연 전문가 100여명이 참여해 미래 조선 기술 개발 관련 논의하는 기구다. 이 자리에서 비전 2040을 이처럼 밝혔다.
LNG선 이후 먹거리로 액화수소, 암모니아, 이산화탄소포집 운반선 등 핵심 기술을 선점하겠다는 구상이다.
HD한국조선해양이 2030년 개발을 목표한 액화수소운반선 조감도 (사진=HD현대)
■ HD현대, 액화수소운반선 개발 추진…삼성重, 액화수소화물창 개발
국내 조선업계는 글로벌 수소 생태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액화수소운반선 관련 기술을 강화하고 있다.
액화수소는 본래 기체인 수소를 영하 253℃에서 냉각해 액체 상태로 만든 수소다. 이는 수소를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한 차세대 기술이다. 액화수소는 LNG선보다 약 100℃ 낮은 극저온 상태에서 냉각해야 하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사업이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은 지난 5월 세계적인 에너지기업 쉘(Shell)과 액화수소운반선 개발을 위한 기술 공동 개발 협약을 맺고 관련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이 지난해 개발한 대형 액화수소탱크와 수소화물운영 시스템 등을 연구 개발하고, HD현대중공업은 수소엔진 개발과 액화수소운반선 설계를 담당한다.
삼성중공업도 수소 시장 주도권 확보를 위해 일찍부터 나섰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2021년 대형 액화수소운반선의 저장 탱크인 ‘액화수소화물창’ 기술을 개발해 시장에 진출했다.
지난달에는 국내 주요 조선·철강사가 액화수소화물창 연구를 위해 뭉쳤다. 삼성중공업을 비롯해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포스코, 현대제철, 한국선급(KR)과 액화수소 선박용 재료 시험 표준화 공동연구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업계 관계자는 “차세대 수소 운반선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한화오션, 그룹 차원 ‘무탄소 선박’ 개발…조선 3사, 다량 친환경 선박 수주
조선업계는 이처럼 친환경 선박 위주의 개발과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한화오션은 한화그룹 차원에서 ‘무탄소 선박 솔루션’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친환경 선박 시장 공략을 위한 ‘선박용 수소연료전지’를 개발하고 있다고 연초부터 다보스포럼(WEF,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 밝히기도 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올해 1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 연차총회에서 진행된 ‘세계 최초 탈화석연료 선박’ 세션에서 무탄소 추진 가스운반선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한화그룹)
이를 위해 한화오션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항공용 수소연료전지 시스템을 개발한 기술을 기반으로 해양 환경에 적합한 고효율·고내구성 수소연료전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한화오션은 “선박용 수소연료전지를 적용한 선박의 운항 관련 정보를 종합 검토해 최적의 운영 방안을 도출할 계획”이라고 밝혀다.
한화오션의 친환경 선박 위주 선별 수주 전략은 최근 2조원대의 수주 성과를 내기도 했다. 중동지역 선사 2개사로부터 LNG운반선 4척을 포함해 총 8척을 수주했다. 올해 들어 LNG운반선 16척, 초대형암모니아운반선(VLAC) 2척 등을 건조할 예정이다.
HD현대의 조선 중간 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은 4일 유럽 지역 선사와 초대형 암모니아 운반선(VLAC) 2척을 건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HD한국조선해양도 이달 들어 4일 유럽 지역 선사와 초대형 암모니아 운반선(VLAC) 2척을 건조하기로 했다고 밝히며 친환경 선박 관련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2척의 수주 금액은 3286억원에 이른다. 이 조선사는 올해 LNG운반선 8척, LPG 및 암모니아 운반선 38척, 액화이산화탄소운반선 2척 등 고부가 친환경 선박 물량을 다량 확보했다.
삼성중공업이 6월12일 구축을 완료한 암모니아 실증 설비 전경 (사진=삼성중공업)
삼성중공업은 무탄소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암모니아’ 활용 기술 확보에도 나서고 있다. 이에 지난달 12일 거제조선소 내 1300㎡ 부지에 관련 실증 설비 구축을 완료했다.
삼성중공업은 실증 설비를 통해 암모니아추진선 적용에 필요한 연료공급 시스템, 재액화 시스템, 배출저감 시스템 등의 개발과 신뢰성 검증을 할 예정이다. 또한 실시간 누출 감지나 독성 중화 장치, 4족 보행 로봇을 통한 감시 등 안전 솔루션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한다.
삼성중공업은 암모니아 실증 설비를 통해 암모니아 가치사슬의 핵심 기술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앞서 삼성중공업은 노르웨이 DNV선급으로부터 초대형 암모니아운반선(VLAC)에 대한 기술 인증도 획득했다.
최성안 삼성중공업 부회장은 “탄소중립 기술의 고도화를 선도해 새로운 기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