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트럼프 일가는 한국 땅을 밟지 않았을까.
최근 홍콩과 일본에는 직접 참석했지만, 국내 컨퍼런스에는 화상 참여에 그치며 뚜렷한 온도차를 보인 트럼프 일가의 행보가 눈길을 끈다. 이에 대해 업계 안팎에선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등 가상자산 법제 정비를 서두르는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한국의 입법 지연 등이 국내 거래소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의 규제 불확실성이 가상자산업계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 홍콩·일본은 직접 방문, 한국은 화상 담화…규제 불확실성탓?
지난 9일 진행된 업비트의 블록체인 컨퍼런스 'UDC 2025'에 트럼프 미 대통령의 차남 에릭 트럼프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I) 공동창업자가 연사로 참여해 윤선주 두나무 최고브랜드임팩트책임자(CBIO)와 대담을 나눴다. 다만 에릭 트럼프 공동창업자는 화상 연결로 대담에 참여했다. 오는 22일 빗썸이 개최하는 'KBW 2025' 컨퍼런스에도 이름을 올린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의 참여 방식도 역시 화상이다.
트럼프 일가의 잇단 한국 미방문은 '한국이 아시아의 가상자산 시장을 앞서 이끌어가고 있다'고 호평한 에릭 트럼프의 발언과 상반되는 행보다. 지난달 말 홍콩에서 진행된 '비트코인 아시아 2025'와 일본 도쿄의 비트코인 기업 메타플래닛 주주총회 일정에 직접 참석해 발언한 모습과도 대비된다.
이러한 한국 홀대 배경에는 가상자산에 대한 국내의 규제 불확실성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는 'UDC 2025'에서 여러 연사들이 반복적으로 지적한 대목이기도 하다.
가상자산의 전 세계 수도로 떠오른 미국에 이어 한국이 아시아 수도가 될 수 있겠냐는 윤선주 CBIO의 질문에 에릭 트럼프는 "특정 부분에 대해선 '아니오'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디지털 경쟁에서 뒤처지는 유럽의 예를 들며 국가 주도적으로 정책 차원에서 가상자산을 육성하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패트릭 맥헨리 전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의장 또한 한국의 규제 행태에 대해 "서로 상충하는 의무 사항이 존재해 향후 혁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는 "충분한 규모의 활발한 시장이 마련되면 소비자에게도 좋다"며 "혁신과 소비자 보호는 상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두나무도 국내 가상자산 규제로 인한 산업적 제약을 체감하고 있다. 오경석 두나무 대표는 "파생상품 거래 금지, 내국인 한정 가입, 법인 거래 제한 등 사업 확장에 불리한 측면이 있다"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하기 위해선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9일 열린 'UDC 2025' 오프닝 무대에 나선 오경석 두나무 대표. (사진=두나무)
■ 국내 거래량 높지만 제도 명확성 뒤처져…법안별 기준 천차만별
한국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온램프(법정 화폐를 가상자산으로 변환) 거래규모가 세계 2위를 기록할 만큼 가상자산 수요가 높은 시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가상자산 관련 규제는 소비자 보호와 시장 질서를 중심에 두고 각 사안별 대응에 그치고 있다. 특히 스테이블 코인 관련 법제 논의가 지지부진한 편이다.
아시아 국가 중에선 스테이블 코인 관련 법제를 명확히 정비해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시장의 신뢰를 구축중인 홍콩·일본의 사례가 주목받고 있다.
홍콩의 제도는 스테이블 코인의 무분별한 민간 발행을 억제하면서, 결제 수단으로서의 활용 가능성과 시장 안정성 확보를 함께 도모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지난 5월 스테이블코인 발행자 라이선스 법이 통과시키고, 오는 8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해당 제도는 발행사를 대상으로 최소 2500만 홍콩달러의 자기자본 요건, 100% 준비금 담보, 자금세탁방지(AML), 테러자금조달금지(CFT), 고객확인(KYC) 의무 이행, 상환 요청 시 빠른 처리와 과도한 수수료 금지 등 엄격한 요건을 명시했다. 발행자는 반드시 홍콩 내 설립 법인이거나, HKMA가 인가한 외국기관이어야 하며, 시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초기에는 일부 기업에 한해 라이선스를 부여할 계획이다.
일본의 경우 소비자 보호와 금융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계획됐다. 2023년 6월 자금결제법(PSA) 개정을 통해 단일 법정화폐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을 '전자결제 수단'으로 정의하고, 발행주체를 은행, 신탁회사, 자금이체업자 등으로 제한했다. 발행자는 발행액 대비 101% 이상의 준비자산을 은행 예금이나 일본 국채 등 실물로 보유해야 한다. 중개업자 등록제와 AML, CFT 요건이 명문화돼 있어 법적 불확실성을 최소화한다. 현재 JPYC 등을 중심으로 엔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실사용 확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선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제도 정비가 아직 초기 단계다. 현재 국회에는 5건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이다. 법안별로 자기자본 요건, 발행 주체, 이자지급 허용 여부 등 조건이 상이하다. 정부는 오는 10월 중 '정부안'을 마련해 입법을 추진할 계획이나, 법안 간 조율이 쉽지 않고 발행 주체 선정이나 감독 체계 등 여러 쟁점에서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예컨대 민병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자기자본 5억원, 발행주체 요건은 대한민국 설립 법인, 이자 지급 허용을 골자로 하나 안도걸 의원의 법안은 자기자본 50억원, 주식회사와 금융기관 중심의 제한적 발행, 이자 지급 금지 내용을 담고 있다.
최근 금융위 해체·이관 등 금융감독체계 개편도 혼선을 겪는 것 또한 문제점이다. 이로 인해 입법 일정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금융감독체계 개편 일환으로 해체 논의가 진행 중인 금융위원회. (사진=연합)
■ "트럼프 일가와 별도 협력건 없어…규제 불확실성은 사업 확장 걸림돌"
국내 거래소들이 트럼프 일가를 가상자산 컨퍼런스에 초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 대해 일각에선 WLFI와의 스테이블코인 등 협력 사업을 염두에 둔 행보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두나무 측은 실제 협력 추진 여부를 묻자 "트럼프 일가 코인 상장 외에 별도로 추진 중인 협력 사안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제 정비가 지연돼 사업화에 차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현재 국회서 관련 입법 논의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만큼, 오경석 대표의 UDC 발표 내용 외에 추가로 밝힐 입장은 없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거래소들의 트럼프 일가 초청과 관련해 "거래 유동성을 늘려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읽힌다"며 "두나무가 네이버페이와 MOU를 진행했던 것처럼 사업 접점을 마련하는 시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다만 이들은 "관련 입법 논의가 마무리돼야 거래소 등 유통 차원의 역할이 명확해지겠지만 현재는 금융위 개편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라며 "현시점에서 추가적인 사업 확장 여부를 논하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윤선주 두나무 CBIO와 화상으로 대담한 에릭 트럼프 WFLI 공동창업자 모습. (사진=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