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셀스)

과거 국내 한 가전 대기업에서 출시했던 유아 전용 세탁기는 어른 빨래와 아이 빨래를 구분해서 소량 세탁하는 방식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의 피부를 걱정해 어른과 아이의 옷을 구별해 세탁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기업은 이러한 니즈를 정확히 찾아냈다.

일상의 불편함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주면서, 해당 제품은 소비자 신뢰와 입소문까지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시장을 넓히고 싶었다. 그들은 1인 가구 예비 고객군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결과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하지만 해당 제품이 세상에 나온 후 고객들의 실제 반응은 인터뷰 결과와 전혀 달랐다. 현실의 1인 가구 빨래 습관을 보면 소량 세탁보다는 일주일 이상의 빨래를 한꺼번에 돌리는 대용량 선호가 훨씬 강했다.

하지만 가사를 전담하는 사람이 따로 없는 1인 가구 구성원들은 빨래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고,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대답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패턴은 초기 스타트업들이 사업계획서나 IR 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많이 발견된다. 투자자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설문 조사를 보면 우리 제품이 나오면 쓰고 싶다는 예비 고객들이 이렇게나 많다”라는 데이터를 강조한다.

안타깝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이런 게 나오면 어떨 것 같아요?”라는 질문을 해서 많은 긍정적 응답을 얻었다 해도, 그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

대다수의 응답자는 설문에 대한 보상(커피쿠폰, 경품)을 기대하거나, 관계자에 대한 선의로 대답하지 자신의 응답이 실제 회사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꼭 써보고 싶어요. 꼭 출시해주세요”라며 건성으로 답변을 하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신제품이 출시되고 구매 결정을 할 때 그들은 전혀 다른 기준, 전혀 다른 탐색의 과정을 거친다. 설문은 설문이고 내 돈과 시간을 쓸지 말지를 판단하는 과정은 별개인 것이다.

“It’s really hard to design products by focus groups. A lot of times, people don’t know what they want until you show it to them.”
(포커스 그룹에 의해 제품을 기획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제품을 보여주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스티브 잡스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고객은 세상에 없는 제품을 상상하고 “정확히 무엇이 필요하다”고 명확히 짚어낼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제품을 사용하면서 기존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을 하기 전 까지는, 누구도 자신의 욕구를 또렷이 자각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객 설문이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문제점과 개선점, 즉 ‘고객의 소리(Voice of Customer)’를 확인하는 조사는 품질 혁신의 초석이 된다. 제품 사용 중 겪는 불편, 개선이 필요한 부분, 추가로 바라는 기능 등은 실제 고객의 피드백을 직접 수집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인사이트다. 이 단계에서의 설문 데이터는 제품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시장 성과를 견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신제품, 서비스가 대상이라면 스스로의 니즈를 자각하지 못하는 고객에게 ‘정답’을 묻기보다, 고객의 ‘불편함’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탐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즉, “이런 서비스가 나오면 쓸 거에요?”가 아니라, “현재 방식에서 무엇이 불편하신가요?”라는 질문으로 대화의 중심을 이동하는 것이 좋다. 그 불편을 뾰족하게,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솔루션을 제시한다면 고객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반면, 이미 시장에 진입한 제품에 대해서는 실제 고객의 사용 경험, 불만, 개선 요청을 집요하게 모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현장 실행력’을 통해 제품의 수준과 시장에서의 지위를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시장조사는 믿고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완성된 지도’가 아니다. 예비 고객의 ‘착한 대답’에 안주하지 말고 고객의 ‘진짜 문제’를 끝까지 찾아내는 집요함을 갖춘 기업만이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유지윤 팀장은 현재 벤처투자회사(VC)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투자심사역으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 글로벌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LG상사(現 LX인터내셔널) 금융팀과 기획팀을 거쳐, 게임 개발 스타트업 플라이셔에서 사업팀장을 역임했다. 이후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커리어를 전환, 현재 기술 기반 초기창업기업 전문 VC인 라이징에스벤처스에서 다수의 벤처투자조합을 운용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