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 6일, 바둑 역사상 최초이자, 국가가 주도한 20세기 최후의 카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김포공항에서 종로 한국기원까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초대 응씨배 우승자 조훈현 9단이었다. 대만의 부호 잉창치(應昌期)가 1988년 창설한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는 4년마다 열리는 일명 ‘바둑 올림픽’으로 최고 권위의 세계 기전이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40만 달러의 우승 상금은 강남 아파트 2~3채를 너끈히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

당시 세계 바둑은 ‘종주국의 자존심’ 중국과 ‘현대 바둑의 본산’ 일본이 주도하고 있었고, 한국은 변방국에 불과했다. 주최 측이 초청한 16명 대부분은 내로라하는 중·일의 강자들이었고, 한국은 조훈현 한 명뿐이었다. 단기필마로 나선 조훈현은 당대 최고수들을 연파하더니 결승에서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聶衛平)마저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는 변방에 머물던 한국 바둑이 일약 세계 바둑의 주류로 진입한 일대 사건이자, 한국 바둑의 역사적 터닝포인트였다.

지금은 이창호, 이세돌, 신진서 등 국보급 기사들의 활약으로 한국 바둑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있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바둑은 마이너리그였다. ‘한국 바둑의 대부’ 고(故) 조남철 선생이 바둑의 도(道)로써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을 가진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으로 한성기원(한국기원의 전신)을 설립하고, 현대 바둑을 보급한지 어언 80년이 지났다. '바둑의 날'로 제정된 11월 5일은 조남철 선생이 한성기원을 세운 날이다. 한국 현대 바둑 80주년을 맞아, 불모지에서 한국 바둑을 이끈 개척자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1989년 10월 출간된 <월간 바둑> 목차. ‘바둑황제’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과 ‘천재 소년’ 이창호의 등장을 다룬 특집기사가 나란히 실려 세대 교체의 서막을 예고하고 있다.(사진=한국기원)

■ 80년 전, 기도보국의 씨앗을 뿌리다

바둑 선진국 일본에서 체계적인 현대 바둑을 익힌 조남철 선생은 한성기원 설립 후, 한국전쟁으로 기원이 쑥대밭이 되자, 잿더미 속에서 자식 같은 바둑돌을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일본기원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기원을 세울 것을 다짐했다. 그는 국제시합을 대비하고 한국 바둑의 현대화를 위해 기존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 바둑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일본식 바둑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작업과 함께 바둑 입문서를 출간했다. 체계적인 입단대회를 개최하여 전문기사 시대를 열었으며, 한중 바둑교류전, 한중일 고교생대회 등 국제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러한 노력은 한국 현대바둑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56년 최초의 바둑대회 국수전이 출범했다. 이는 취미나 오락 문화가 전무하던 시절, 혼란스럽던 전후 한국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일보 사옥이 위치한 광화문 사거리에는 야외 공개해설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수전의 탄생은 본격적인 프로기전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 서울신문의 패왕전, 중앙일보의 왕위전 등 신문사 주최 기전이 5개로 늘어났고, 이들 언론사 주최 기전은 오랜 시간 바둑 보급과 대중화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회를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조남철 선생은 실력도 압도적이어서 초대 국수를 포함해 9년 연속 타이틀을 지켰다. 이후 한국바둑의 최고수를 일컫는 국수(國手) 계보는 김인, 윤기현, 하찬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시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불세출의 기사 조훈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 불세출의 조훈현, 그 아성에 도전하다

9살 프로기사 조훈현의 출현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문하에서 수학한 조훈현은 귀국 후, 1974년 최고위전 우승을 기폭제로 국내 바둑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80년 서봉수의 마지막 보루였던 명인전마저 빼앗으며, 9개 국내기전을 모두 석권하는 전관왕의 위업을 이뤘다. 응씨배에 이어 후지쓰배, 동양증권 등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달성까지 ‘바둑황제’ 조훈현은 숱한 기록을 남겼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가히 ‘조훈현 천하’.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에도 조훈현의 아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조훈현 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필생의 라이벌’ 서봉수 9단이다. 독학으로 바둑을 터득한 서봉수는 특유의 잡초 같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조훈현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7~80년대 국내 도전기는 거의 조·서 대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상대 전적만 놓고 보면 한참 밀렸지만, 당대에 그만큼 처절하게 조훈현을 상대로 많은 혈투를 벌인 숙적도 없다. 반세기 동안 무려 372차례나 맞붙었으니 말이다.

서봉수의 뒤를 이어 조훈현의 영토를 침탈한 이가 유창혁 9단이다. 두터운 공격 바둑이라는 새로운 기풍을 선보인 유창혁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닉네임으로 유독 큰 대회, 특히 국제대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응씨배, 후지쓰배, 삼성화재배, LG배 등 모든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며, 조훈현에 이어 두 번째 세계대회 그랜드슬래머가 되었다.

한국 현대바둑 80주년을 맞아 제8회 바둑의 날 기념식이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사진=한국기원)

■ 전혀 새로운 바둑의 신이 등장하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조훈현 천하에 균열을 일으킨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직접 가르친 제자 이창호 9단이었다.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스승의 영토, 아니 더 나아가 세계 바둑계의 지형을 뒤흔든 소년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10살이 되던 해,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간 이창호는 1989년 최고위전에서 스승을 상대로 첫 타이틀을 획득하고, 불과 8개월 뒤 국수 타이틀마저 정복한다. 올해 개봉한 영화 '승부'에서 조·이 사제대결의 모습이 그려진 것처럼, 두 사람은 한집에 살면서 여러 해 동안 처절한 승부를 겨뤘다. 1992년 중국과 일본의 초일류들이 모두 참가한 동양증권배에서 최연소 세계 챔피언에 오르며, 세계 무대에도 존재감을 알렸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등장은 세계 바둑계의 불가사의였다. 공격과 행마를 중시하는 당시 트렌드와 전혀 다른 스타일, 즉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형세 판단과 계산의 영역으로 바둑의 메타를 바꿔 놓았다. 그렇게 바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고, 세기말 절대 강자로 군림한 이창호의 기세는 2000년대 밀레니엄 시대에도 이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 강헌주 PD는 바둑TV, 온게임넷(OGN), 투니버스 등에서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총괄했다. 세계 최강의 한국 바둑과 e스포츠의 중심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시도했고, 2003년 프로 단체전이 전무했던 시절 한국바둑리그를 기획하여 출범시켰다. 현재 KB바둑리그는 세계 최고의 바둑리그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