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대통령님, 지금은 규제를 풀 때가 아니라 예산을 풀 때입니다.” 지난 15일 제1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자율주행 스타트업 대표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전한 말이다.

자율주행 기술에 천문학적인 자원을 투입하는 미국과 중국에 대응해야 한다는 맥락이었지만, 필자에게는 그 맥락을 넘어 오늘날 세계 경제의 시대정신을 압축하는 말로 다가왔다. 그렇지, 지금은 예산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다.

미국은 2026년부터 GDP의 1.7%에 해당하는 대규모 감세정책을 시행한다. 이미 부채 부담이 막대한 상황에서도, 이를 감당하기 위해 연준을 강하게 압박해 금리를 내리려 하고 있다. 미국과의 마찰로 수출부진에 시달리는 중국도 이대로 주저앉지 않기 위해 끝없이 부양책을 쓰고 있다. 8~9월 경제지표 악화 이후 추석 이전에 새로운 부양책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높아졌다.

유럽은 더 심란하다. 지난 몇 년간 재정으로 경기를 떠받친 국가들의 국채 금리가 치솟고 재정건전성 우려가 커지고 있다. 프랑스 신용등급이 강등되었고, 영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론상이라면 재정을 긴축하고 불황을 감내해야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긴축은 곧 정권 위협이다. 재정 건전화를 시도하던 프랑스 총리, 일본 총리 모두 사임했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부가 긴축을 선택할 수는 없다. 재정을 유지하며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를 유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스위스는 기이한 예외다. 재정 여력이 충분해 스위스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주변국의 확장정책 때문에 스위스 프랑이 지나치게 강세를 보였다. 이에 중앙은행은 스위스프랑을 찍어내 달러와 유로를 사들이고, 쌓인 외화로는 미국과 유럽 주식을 매입하고 있다. 이렇게 스위스 중앙은행이 인쇄기에서 찍어낸 돈으로 미국 빅테크 주식 5종목에 50조원이 넘는 투자를 했다. 완화가 필요 없는 나라조차 유동성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자국 우선주의, 지정학적 긴장, 그리고 이로 인한 경제 하방압력이 전세계 거의 모든 국가들에게 재정확대를 강요하고 있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불황을 방치하면 정권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정 확대는 이어지고, 더 강력한 지출을 약속하는 정권이 등장한다. 늘어나는 부채는 물가 압력으로 연결되지만 중앙은행은 금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한 나라가 내리면 옆 나라도 따라 내려야 한다. 고물가 속 마이너스 실질금리가 만들어지고, 현금 보유자는 투자를 강요 받는다. 세월이 불안하니 이 돈은 실물에 투자되기보다는 자산시장으로 흐른다. 돈의 흐름은 시세를 만드는 힘이다. 전세계 주식시장, 주택시장이 끝없이 오른다.

시장은 모멘텀을 키워가고, 투자자들은 소외될 수 없다는 불안감에 더 뛰어든다. 경기침체와 유동성 긴축이 가장 큰 위험이지만, 정부가 재정으로 경기침체를 막고, 돈을 계속 풀어 유동성 긴축을 차단한다. 리스크의 핵심이 제거된 시장에서는 투자가 오히려 안전해 보인다. 이게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새로운 채권 수요를 만들겠다고 하니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이 흐름을 강화한다. AI 투자는 당장은 수익이 없지만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투자를 정당화한다. 오픈AI는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오라클에 400조원이 넘는 서버를 ‘외상 주문’했고, 오라클은 이 소식만으로 하루 만에 시가총액이 250조원 불어났다. 400조원짜리 서버에서 AI가 돌아가면 지금은 상상도 못할 슈퍼인공지능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거대한 투자가 다시 기대를 부추기고, 기대는 다시 시장의 힘을 키운다.

위험자산 가격은 단기적으로 유동성과 심리에 좌우된다. 전세계가 일치단결해 돈을 푸니 유동성은 계속 늘어난다. 우려했던 리스크들은 정부 재정의 확대로 차단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AI대규모 투자로 연장된다. 게다가 시세가 매일매일 오른다. 심리도 나빠질 이유가 없다. 완벽한 강세장의 조건이다.

무서운 강세장이 오고 있다. 다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조건이 완벽해 시장이 무섭게 오를 것 같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무서움이다.


강대권 대표는 현재 라이프자산운용을 이끌고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산업경제학 전공)를 마쳤고, 서울대 가치투자 동아리 '스믹(SMIC)' 출신으로도 유명하다. 가치투자 2세대 스타 펀드매니저인 강 대표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을 거쳐 유경PSG자산운용에서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역임했다. 당시 국내 운용사 최연소 CIO다. 지난 2016년, 2020년 국내 주식형 운용사 수익률 1위를 기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