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깽이도 덤벙이고, 대부인 마님도 나막신짝 들고 나선다는 추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씨뿌리고 김매고, 폭염에도 애지중지, 공들인 노고로 치면 바쁜 일손이 무색할 만큼 수고로웠던 시간이었을 게다. 부디 그저 땀 흘린 만큼 거둘 수 있기를…. 기후변화의 시대에 뿌린 대로 거둘 수 있음은 얼마나 큰 행복이겠는가.
모두의 맘이 풍요로운 명절 추석이라지만,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스타트업들이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 것이다. 시제품 개발부터, 까다로운 인증과 특허, 시장 반응 검증 등 대다수 창업가들에게 최소 2~3년은 수익은 언감생심, 그저 비전을 좇아 고군분투 중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바쁜 와중에도 외롭다는 우리 스타트업 대표님들, 추석 명절에 둥근 보름달 보며 외로움을 더 큰 비전으로 승화시키고, 소원 꼭 이루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 수많은 고비 넘는 연구자 창업, 협업은 필수
어떤 창업인들 어렵지 않은 일이 있겠는가마는, 전임상부터 1상, 2상, 3상에 시판 허가까지 개발 주기가 긴 바이오 신약 연구기업들이나, 높은 기술적 진입 장벽을 넘어 글로벌 진출을 시도하는 딥테크 기업들의 경우는 지원과 협업이 절실하다. 그래도 AI 기술 덕에(2조~3조원 비용을 6천억원 수준으로 감소시킨 사례도 있을 만큼) 기간과 비용이 효율화되고 있어 우리 연구자들의 기술 창업도 상당히 활발해졌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이 그 기술을 제품화해 글로벌 시장까지 진출하기에는 단계마다 실험에 드는 엄청난 비용 부담은 물론이거니와 국제 특허라도 받을라치면 출원부터 등록까지 평균 2~3년의 기간에, 발생하는 비용은 수 천만원에 달한다. 그러니 정부 지원 사업에 들어오는 우수한 제약·바이오 스타트업들이라 할지라도 상장을 꿈꾸는 이들은 많지 않고, 라이선스 아웃(license-out ; 스타트업이 자체 개발한 기술, 지적 재산권을 다른 기업이 사용하도록 허가하고 그 대가로 선불금, 로열티 또는 지분 등의 보상을 받는 기술이전 행위)이나 M&A를 목표로 하는 창업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기업 대표들은 당장 국내 대형 제약 회사부터 해외 대학 연구팀, 더 나아가 글로벌 기업들과의 협업을 모색하느라 연구를 할 틈이 없을 지경이란다. 기술의 융합과 확산의 속도가 빠른 AI 시대에 글로벌 시장에서 숨 가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는 대기업들 역시 상호 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의 과정으로 가고 있다.
다만 협업을 한다 한들 요구받는 조건도 많고, 기술 탈취 등의 우려까지 겹겹의 어려움에 둘러싸인 스타트업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그야말로 산더미다. 관건은 제한된 여건 속 지적 재산권을 보호받으면서도 협업의 시너지와 파급력을 극대화하고 가치를 얼마나 빠르게 실현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만약 연구개발 과정부터 시장진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자의 참여를 통한 즉각적인 피드백과 지원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면 틈틈이 ‘수확’의 기쁨을 맛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해 초기의 아이디어와 기술이 더 빠른 시간에 더 큰 가치로 확산될 수 있지 않을까.
■ 트럼프 발표조차 즉각 반박되는 시대
얼마 전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이례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언급)가 임산부의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 성분) 복용과 자폐증의 연관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며 미국 과학계가 시끄러웠다. 필자가 주목한 점은 대통령이 직접 발표하고 FDA(미국 식품의약국)가 뒷받침한 권고에 대해 거의 즉각적으로 관련 학계, 의학·연구기관, 자폐증 관련 단체들이 일제히 해당 주장에 대한 모순된 증거들을 제시하며 반대 성명을 냈다는 것이다. 수많은 과학적 연구 결과물과 데이터들이 활발히 공유되고, 관심 있는 모두의 참여가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2005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배아복제 줄기세포’ 사건이 떠올랐다. 해당 연구를 진행했던 박사가 사이언스지에 그해 5월 논문을 게재한 후 11월 공영방송 PD수첩에서 논문 조작의 의문을 제기하고, 12월 서울대에서 조사위원회를 꾸려 이듬해 1월 복제배아 줄기세포가 존재하지 않으며 논문이 조작되었다는 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그나마 이 과정에서 젊은 과학자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브릭(BRIC)이 상당한 기여를 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두 사건을 언급한 이유는 기술이 발달하고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공적 영향력이 큰 사안의 과정들이 투명하게 공개돼 오류나 부작용의 측면을 빠르게 발견하고, 피드백을 통해 보다 올바르고 나은 가치로 발전토록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 협업의 혁신을 이끄는 DeSci(탈중앙화 과학)
이러한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기술적 방법 중 하나가 DeSci(탈중앙화 과학)이다. DeSci는 블록체인 및 웹3(Web3) 기술을 활용해 기존의 과학 연구, 자금 조달, 데이터 접근 및 소유, 협업 방식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오픈소스 운동이다. 블록체인 인프라의 분산형 저장소를 활용해 연구데이터와 출판물을 공개적으로 제공하고, 이는 블록체인에 기록되므로 변조 방지 및 항시 검증이 가능하다. 또한 스마트 계약을 통해 저작물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경우에도 저자는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고, 토큰 기반 인센티브를 활용해 개인 기부(투자)자부터 기관 후원자까지 다양한 기여자들의 지원금을 모집할 수 있다. 자금의 사용 방식을 추적할 수 있어 투명한 관리까지 가능하다. 유전자 실험을 비롯해 천문학적인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고, 여러 단계의 검증이 필요한 바이오헬스나 전 세계의 데이터가 필요한 기후테크 등의 분야에서는 매우 요긴하고 효과적인 방식이자 커뮤니티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들의 경우는 보다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참여하고, 자신의 데이터 제공에 대한 인센티브도 받을 수 있어 모두의 참여와 시너지를 높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탄소 감축을 위한 실천이 중요한 기후테크 분야에서도 다양한 토큰 기반 사업모델을 통해 전 세계인의 참여를 이끌 수 있어 사회적 임팩트를 지향하는 많은 기관과 기업들에게 더 큰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 모두가 참여하는 연구·창업 생태계를 꿈꾸며
나의 업무 일상 측면에서도 이런 커뮤니티가 제도·활성화 된다면, 물리적 여건의 한계(한정된 지원 기간, 소수의 심사위원, 지역간 격차, 딥테크 분야 연구개발비 부족 등)를 뛰어넘어 평가부터 투자까지 공정성 시비 없이 물 흐르듯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심심찮게 문제가 불거지는 지원 예산의 부당 사용 문제도 암호화폐로 펀딩을 하면 자금 사용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즐거이 해본다.
올 초 미국의 분산형 애플리케이션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세이재단(Sei Foundation)은 6500만 달러 규모의 사피엔캐피털(Sapien Capital)을 발족시키고, 헬스테크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토큰 및 지분 투자형 펀드를 조성해 수 십억원 단위의 단계별 투자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침 우리나라도 새 정부가 들어서며 150조원에 달하는 국민성장펀드를 조성해 혁신적인 도약을 도모한다 하니, 여러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러한 ‘탈중앙화’ 된 블록체인 기반의 연구와 창업 지원 생태계를 시범 도입해 봄은 어떨까 조심스럽게 희망해 본다.
■ 법학박사로 국회, 청와대, 공공기관을 두루 거치며 교육, 과학기술, 창업 정책을 다뤘다. 교육정책에 매진했을 당시에는 하나의 정책에 얼마나 많은 이해와 갈등이 얽히고설킬 수 있는지 깊이 체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 재직 시절엔 ‘창의교육’과 ‘교육기부’에, 창업진흥원에서는 ‘창업’과 ‘혁신’에 꽂혀 정부정책과 현장 사이에서 동분서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