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스틸컷)
[뷰어스=문서영 기자] 살아가며 멘토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있다. 작게는 결정을 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크게는 인생의 고비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멘토를 원한다. 비단 크고, 작은 사건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동안 지지대가 되어 줄 멘토 한 명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살아 나갈수록 자주 든다.
요즈음이 그렇다. 가정을 이루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는 내 삶의 자세를 바꾸고 생각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이를 올바르게 키워내고 싶고, 최소한 내 아이가 존경할만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더해진 고민이다. 직장에서도 후배들이 더 많아진 상황이 되고 보니 ‘어떤 선배가 될 것인가’가 깊은 고민을 안긴다. 세대가 갈릴 때, 기함할만한 말을 장난이랍시고 걸어올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지는 물론이고 내 앞을 지나간 선배들을 곱씹어보며 나는 이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로 남을 것이냐에 무척 고심하게 된다. 결국 지금의 ‘나’가 아닌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으로 거듭날 것인가의 문제에 앞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 것인가가 먼저라는 생각이다. 그 마음가짐을 바로 잡아주는 존재가 바로 멘토다. 좀처럼 찾기 힘든 멘토의 역할을 해주는 최적의 상대는 바로 책이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치유서, 지침서들 가운데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억지 치유나 교훈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인 멘토다. 살랑이는 산들바람, 바람 한 점 없는 숲 속의 작은 연못 위 물결처럼 잔잔하게 생각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한동일 교수는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이자 사제이자 교수다. 그는 2010년 하반기부터 2016년 상반기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진행했던 ‘초급·중급 라틴어’ 수업의 내용을 정리해 ‘라틴어 수업’이란 책을 엮었다. 서강대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입소문을 타고 연세대, 이화여대를 비롯해 신촌 대학가를 벗어난 지역 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까지 찾아와 늘 강의실이 만원이었다고.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이 정도 홍보 문구에도 별 흥미가 없었다. 그 어렵다는 라틴어에 수업까지 붙어 있는 제목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이 꾸준히 사랑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책이 가진 진가가 궁금했다.
(사진='라틴어수업' 책표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틴어 수업’은 그 진가를 충분히 드러내는 책이다. 저자는 단순한 어학 수업을 인생 강의로 변모시킨다. 저자는 단순한 어학 수업이 아니라 라틴어의 체계, 라틴어에서 파생한 유럽의 언어들을 시작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 사회 제도, 법, 종교 등을 단어 안에 풀어낸다.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은 꿀맛이다. 그런가 하면 라틴어를 필두로 한 외국어와 한국어의 언어 방식 차이를 비교하며 나이와 서열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평가 절하하는 한국 문화를 꼬집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라틴어 한 문장 문장마다 저자가 유학 시절 경험했던 일들, 만난 사람들, 공부하면서 겪었던 좌절과 어려움, 살면서 피할 수 없었던 관계의 문제, 자기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성찰 등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화두들이 함께 녹아 있다. ‘라틴어 수업’은 단순한 라틴어 강의가 아닌 종합 인문 교양 수업에 가깝다는 출판사의 서평에 100% 동의한다.
무엇보다 사제이자 학자인 저자가 삶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방식은 무척 인상깊다. 잔잔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그의 문장들은 책장을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로 곱씹고 또 곱씹게 되는 지점들이 많다. 고요하게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생각을 다듬어주는 한편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남다른 해석법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 중간 중간 등장하는 라틴어의 어려운 동사 변화 등 문법들은 모두 저자가 하고픈 말들과 연결되어 있다. 허투루 쓰인 문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독자에게 읽는 보람을 느끼게 한다.
일례로 ‘네가 주면 나도 준다’라는 뜻의 라틴어 ‘도 우트 데스(Do ut Des)’에 대해 저자는 법률적 개념에서 출발한 이 문장을 상호주의로 이어간다. 국가와 국가, 혹은 개인과 개인에 있어서도 내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출 때 그것이 힘이 되고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된다는 결론은 사회에 진출할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다. 문제 하나 더 풀고 문법 하나 더 외우는 것보다 살아가며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진=흐름출판)
다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수업을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대학생들에게 부러움이 이는 동시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라틴어 수업’은 그 자체로는 읽는 내내 생각이 정화되는 기분을 선사하지만 문득 돌아보게 되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연 이런 진심어린 교육을 수업에 녹여내 알려 줄 교수가 몇이나 되는가를 생각하면 10년의 입시 준비와 사회인의 중간에 놓인 대학생들의 현실은 안쓰러울 정도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맨 몸으로 세상에 나온 직장인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정신적으로 단단해지고 사회와 삶을 마주하는 자세를 배우고 나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간극은 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라틴어 수업’은 출간이 감사한 책이다.
책은 312쪽이다. 중간 중간 언급되는 라틴어 문법은 어렵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존대어로 쓰여진 책은 정말 저자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양 술술 읽힌다. 어느 정도냐면 일부 독자들이 “책이 너무 빨리 읽혀 아깝다. 아껴두고 두고 두고 읽고 싶다” “일부러 한 챕터씩만 읽고 있다”고 할 정도다. 인생에 한번은, 들어볼 가치가 있는 수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