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사진=cgv아트하우스)
[뷰어스=남우정 기자] “산다는 것 자체가 반응이죠”
한석규와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바로 ‘반응’이 아닐까. 한석규는 자신이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 새로운 한국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 심지어 산다는 것까지 모든 것은 반응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한석규의 24번째 작품인 ‘우상’ 역시 그를 반응하게 만든 작품이다. ‘우상’은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상황을 맞은 남자 구명회(한석규), 아들을 잃고 진실을 찾아가는 남자 중식(설경구), 사고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진 여자 련화(천우희)가 저마다 맹목적으로 지켜내려고 했던 우상을 좇아 폭주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한석규는 사람들의 우상 같은 존재이지만 내면에 욕망을 품고 있는 지독한 아버지이자 정치인인 구명회로 변신했다.
“구명회라는 인물은 지하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반응을 하기 시작해요. 그 반응이 건강치 않은 행동이죠. 스토리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병자의 반응을 보이죠. 그런 비겁한 인물을 해보고 싶었어요. 한석규가 가진 이미지를 변신하기 위해서? 그런 맘도 조금은 있겠지(웃음) 그렇지만 ‘우상’으로 한국사회의 사건 사고가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다는 이수진 감독에게 반응을 했던 것 같아요”
‘우상’은 ‘한공주’로 파격적인 데뷔를 한 이수진 감독의 차기작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한석규 역시 이수진 감독의 도전정신을 높게 샀다. 강렬했던 글에 매료됐고 이수진이라는 창작자의 고충을 이해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창작자로 건강한 반응이에요. 약간 다르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한국영화죠. ‘이거 완성이나 되겠나’ 싶었는데 진심이 건강하고 의도가 시건방지지 않고 겸손해요. 안주하지 않고 도전적이잖아요. 시나리오를 덮었을 때 ‘독전’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글을 통해서 봤을 때도 엔딩이 강렬했거든요. 나도 전달하고 싶고 공감했죠. 이수진이라는 창작자 정말 괜찮아요. 참 치열하게 하는데 그게 신인 감독의 장점인 것 같아요. 나도 신인인 때 그런 마음으로 연기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신인 감독을 선호하나 봐요. 신인 감독과 한 게 꽤 많아요”
다만 ‘우상’은 보는 이들에 따라서 해석하는 방향이 확연하게 갈릴 작품이다. 많은 은유와 숨겨진 메타포가 많아 조금은 불친절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석규 역시 이를 인정했다. 시사회를 보고 이수진 감독에게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만 더 보여주지”라는 말까지 했었다고.
“영화가 어렵다는 건 동의해요. 시나리오 봤을 때부터 어려웠거든요. 이수진 감독이 과한 것, 넘치는 걸 굉장히 싫어해요. 과한 표현을 싫어하는 데 이제 알 것 같아요. 나도 내 연기를 볼 때 그러거든요. 달 떠 있는 내 연기를 볼 때 꼴보기 싫어요(웃음)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다 퍼즐이 있어요. 이수진은 그런 창작자에요”
‘우상’은 개봉 전 제 69회 베를린영화제에 공식 초청까지 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가장 기대를 모은 것은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의 조합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인 한석규와 설경구의 미친 연기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샛별 같은 존재인 천우희가 가세하면서 ‘우상’은 배우들의 캐스팅만으로 한 몫은 하고 들어간다. 한석규 후배들의 연기에 극찬을 보냈다.
“이수진 감독이 (천)우희에게 한국에서 가장 중국어를 잘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잖아요. 연기자 입장에선 미치는 주문이죠. 조금만 더하면 중국사람 되라는 거죠(웃음) 정말 박수를 보내주고 싶어요. 시나리오 보면 진짜 한숨이 훅 나와요. 자칫하면 밑천 다 드러나고 거기다 눈썹까지 밀었죠. 100년 기준으로 보면 후배가 아니라 나랑 동시대 배우에요(웃음) 대한민국에서 여자 연기자로 산다는 것 정말 힘들어요. 근데 한국영화에서 정말 괜찮은 여배우가 완성됐어요. 설경구, 천우희 같은 동료로 지켜봤을 때 왜 연기를 하는지 이유를 알겠어요. 정말 존중하고 그런 연기자들과 같이 공연해서 좋았어요. 연기는 액션과 리액션인데 내가 반응할 수 있는 소스를 던져줘서 좋았어요”
■ “(최)민식이형, 존중 넘어 존경해요”
성우로 시작한 한석규는 1991년 MBC 공채탤런트가 된 후 ‘서울의 달’ ‘초록물고기’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 9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후에도 ‘구타유발자들’ ‘이층의 악당’ ‘뿌리깊은 나무’ ‘낭만닥터 김사부’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내놓으며 쉼 없는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그도 지쳤던 순간이 있다. 그 시기를 견디면서 연기에 대한 생각을 다르게 먹기도 했다.
“나도 연기를 하다가 지치기도 하고 의미를 잃어버렸던 때가 있어요. 그때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건강치 않은 반응을 한 거죠. 의미를 찾기 보단 처음으로 돌아갔어요. 연륜을 쌓고 있다고 해서 좋아진 게 아니라 처음 것을 잃어버린다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미완성이고 치기 어린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 퇴화하지 않게 하는 게 연기라는 걸 느꼈어요. 할 수 있는 재료는 갖고 태어났는데 나이 먹으며 퇴화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동료 배우가 바로 최민식과 김혜수다. 같은 학교 선후배이기도 한 최민식과는 ‘서울의 달’에 이어 ‘쉬리’를 함께 하며 영광의 세월을 보냈고 올해 개봉 예정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다시 만났다. 김혜수와는 ‘이층의 악당’에서 호흡을 맞췄다. 지쳤던 시기 자신을 깨워준 두 배우를 한석규는 잊지 않았다.
“이번에 민식이 형이랑 하니까 좋더라고요(웃음) 존중을 넘어 서로 존경해요. ‘쉬리’ 이후로 같이 연기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어요. 벌써 기대돼요. 우리 둘이 인터뷰를 어떻게 할지, 만담 같지 않을까(웃음) 나에게 정말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에요. 성향이 다른데 그게 재밌어요. 그런 사람과 연기를 하니까 난 반응만 하면 되죠. ‘이층의 악당’ 땐 김혜수에게 정말 고마웠죠. 지쳐있을 때였거든요. 그 때 혜수랑 연기를 하면서 이 일을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이라는 걸 느끼게 해줬어요”
비겁한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한석규의 소망은 ‘우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우상’을 통해서 한석규는 다른 꿈을 꾼다. 데뷔 30년차, 아직 한석규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구명회와 반대인 사람을 해보고 싶어요. 용감하게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요. 그럴 기회가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기다려야죠. 이번엔 인간의 치졸함, 찌질함을 보여줬다면 다음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싶네요. 좌절을 이겨내는 그런 인물, 실존인물인데 언젠가 하게 될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