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신부 옆)이 2016년 4월 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아들 선동욱 씨의 결혼식에 참석해 기념촬영 하고 있다. 신랑 뒷쪽에 정의선 회장, 정몽구 회장 옆에 정태영 부회장이 자리하고 있다.(자료=연합뉴스) 정몽구 회장이 금융업에 유달리 욕심을 낸 것은 개인 취향만으로 보기 어렵다. 자동차는 소비재 가운데 가장 가격대가 높게 형성된 품목이다. 사고 싶다고 덜컥 살 수도 없다.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하지만 금융이 엮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할부나 리스를 통하면 의외로 구매가 쉽다. 선진국 자동차 시장은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경기를 덜 타는 금융을 보완재로 삼는 추세는 이어져 왔다. 2000년대 일본의 도요타는 금융 부문 수익이 자동차 부문 수익보다 더 클 정도였다. 아버지로부터 건설과 반도체가 아닌, 자동차를 물려받은 정몽구 회장으로선 어떻게든 금융을 옆에 끼고 키워야 했다. 금융 업종에는 은행, 보험(생명보험·손해보험), 증권·자산운용, 카드·캐피탈 등이 있다. 다만 1990년대 도입된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 원칙에 따라 은행을 소유하긴 어려웠다. 자동차보험에 필수인 손해보험사는 동생 정몽윤의 몫(현대해상)이었다. 캐피탈(현대캐피탈)은 이미 갖고 있으니 남는 것은 생명보험, 증권, 카드 정도. 생명보험은 덩치가 커 갓 계열 분리한 현대차그룹이 공략하기에 적절치 않은 대상이었고 증권은 2000년 ‘왕자의 난’ 때 욕심을 냈다 쓰디쓴 상처를 입은 바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위시리스트에서 하나씩 지우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카드'. 2001년 정몽구 회장이 대우그룹 계열의 부실 카드사 ‘다이너스티’를 전격 인수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증권과 보험도 탐이 났지만 당시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생존을 위한 결단에 가까웠던 카드업 진출. 하지만 녹록치 않았다. 시장점유율 2%도 안 되는 회사가 적자 규모는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연체율도 두 자릿수에 육박했다. 특급 구원투수가 필요했지만 현대차그룹에 금융 분야 전문경영인은 거의 없었다. 정몽구 회장은 고심 끝에 2003년 둘째 사위 정태영을 투입키로 마음을 굳힌다. ■ 물 만난 정태영, 금융계 스타 CEO 부상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아들 8명, 딸 3명을 낳아 대가(大家)를 이뤘지만 정몽구 회장은 상대적으로 일가가 소박했다. 딸 셋에 늦둥이 아들 하나를 뒀는데 첫째 사위는 의사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거친 그룹 문화에서 믿고 맡길 3세대는 둘째·셋째 사위와 외동아들 정도. 아들 정의선은 당시 30대 초반으로 경험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둘째 사위 정태영에게 기회가 돌아갔다.(현대하이스코 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셋째 사위는 후일 이혼으로 그룹 승계 구도에서 이탈했다.) 40대 초반의 젊은 CEO 정태영은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해냈다. 디자인 경영으로 업계에 M카드 돌풍을 일으켰다. 출시 1년 만에 신규 회원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03년 카드채 사태로 업계가 초토화 됐을 때 현대카드는 새 역사를 써나갔다. 2004년 1898억원 적자였던 영업이익은 2005년 흑자(288억원)로 돌아섰다. 정태영 사장이 경영을 책임진 지 불과 2년여 만에 일어난 마법 같은 변화다. 재벌가 사위라는 꼬리표는 희미해졌고, 일약 금융계의 스타 CEO로 떠올랐다. 이후 슈퍼 매치, 슈퍼 콘서트 등 이른바 ‘슈퍼 시리즈’로 디자인 경영에 문화 경영까지 결합, 혁신경영의 전도사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열 살 아래 처남 정의선은 CEO로서의 출발이 순탄치 않았다. 사위의 성공에 고무된 정몽구 회장은 현대모비스 부사장이었던 아들 정의선을 2005년 기아자동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보냈다. 매형보다 사장 명판을 1년 5개월 늦게 팠지만 나이는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 사장 취임 이후 기아차 실적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2006년 1200억원, 2007년 55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뒤 정의선 사장은 2008년 4월 대표이사직에서 일단 물러나야 했다. 2006년 터진 현대차 비자금 사태가 그룹 실적에 악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실적 저조 논란 속에 재벌가 3세의 경영능력에 회의론이 제기된 것도 맞다. 승승장구하던 정태영 사장이 현대차 기획조정실장으로 투입돼 위기를 수습할 것이란 소문이 당시 업계에 파다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정태영 사장이 금융업계를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아차 실적도 2009년 턴어라운드를 이루면서 정의선 사장을 둘러싼 잡음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이후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 내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반면, 정태영 사장의 상승 기세는 꺾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현대라이프생명이 제공했다. ■ 정태영의 '화무십일홍' 현대차그룹은 캐피탈, 카드, 증권에 이어 2012년 생명보험업에 진출한다. 2003년 대신증권으로부터 대신생명을 인수한 GC녹십자는 영업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녹십자생명보험을 매물로 내놨고, 현대차그룹이 이를 낚아챘다. 2000년 계열 분리 당시 언감생심이던 금융 포트폴리오 구축(캐피탈-카드-증권-보험)의 꿈이 12년 만에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자금은 현대모비스(56.15%)와 현대커머셜(34.51%)이 조달했다. 인수 아이디어부터 정태영 사장이 제시했기에 경영권도 그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보험에선 카드와 같은 마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태영 사장은 2012년 현대라이프 출범 당시 ‘2년 내 흑자’를 공언했지만 5년이 지나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000억원씩 두 차례 유상증자에 이어 2015년에는 대만 푸본그룹으로부터 2200억원을 투자받았음에도 좀처럼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적자는 눈덩이처럼 쌓여 2000억원을 넘어섰다. 2010년대 후반은 그룹 주축인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자동차 계열사들도 실적 부진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2021년 국제회계기준 IFRS17 도입을 앞두고 현대라이프에 조 단위 자본확충이 필요했는데 그룹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인식됐던 게 사실이다. 회생 여부가 불투명한 보험사에 그룹 자금이 수천억원씩 지원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현대라이프는 점포 폐쇄, 설계사 감축 등 구조조정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보험의 위기는 카드·캐피탈·커머셜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국 주주로서만 역할을 하던 대표이사의 아내(정명이)가 2018년 경영의 전면에 나선다. 그룹의 현대라이프 지원이 끊기면서 경영권은 푸본그룹으로 넘어갔고 회사 이름도 푸본현대생명으로 바뀌었다. 그해 12월 정태영 부회장은 현대라이프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경영 실패의 파장은 컸다. 와이프가 경영에 나선 이상 사위는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 소환될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혁신경영 전도사’ 정태영 부회장의 체면은 제대로 구겨졌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발상의 전환으로 혁신적인 방안을 추구하던 정태영 부회장의 스타일이 보험업에선 오히려 독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보험의 경우 상품 설계 못지않게 설계사와 판매채널이 중요한데 ‘마트에서 파는 보험’ 같은 반짝 아이디어는 카드업에나 통할 법한 방식”이라고 돌아봤다. 금융권의 다른 관계자는 “비교적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현대라이프의 턴어라운드에 실패했고 그 결과 그룹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측면이 있었다”며 “결국 이런 과정이 현대차그룹이 현대캐피탈을 되가져가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만일 정태영 부회장이 카드에 이어 보험까지 경영에 성공했다면 금융 포트폴리오를 거느리고 계열 분리할 가능성이 커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해 현재 카드와 커머셜로 입지가 쪼그라드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풀이다. 현대캐피탈은 자동차 구매 고객에게 기념품으로 금융계열사 로고가 찍힌 우산을 지급하곤 했다. 2018년까지는 현대라이프와 현대캐피탈 로고가 함께 찍혔다.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 재벌 중 하나인 현대차그룹의 금융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

[현대차와 금융②] 정태영, 그가 현대라이프까지 성공시켰다면…

정몽구, 위시리스트에 마지막 남은 '카드'...정태영의 구원등판
디자인 경영으로 M카드 돌풍 '정태영' vs CEO 출발 순탄치 않던 '정의선'
보험에선 일어나지 않은 마법...정태영의 화무십일홍
현대라이프 턴어라운드 실패...현대차 금융 미래가 바뀌다

최중혁 기자 승인 2024.05.22 12:48 | 최종 수정 2024.05.23 15:30 의견 0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신부 옆)이 2016년 4월 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의 아들 선동욱 씨의 결혼식에 참석해 기념촬영 하고 있다. 신랑 뒷쪽에 정의선 회장, 정몽구 회장 옆에 정태영 부회장이 자리하고 있다.(자료=연합뉴스)


정몽구 회장이 금융업에 유달리 욕심을 낸 것은 개인 취향만으로 보기 어렵다. 자동차는 소비재 가운데 가장 가격대가 높게 형성된 품목이다. 사고 싶다고 덜컥 살 수도 없다.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하지만 금융이 엮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할부나 리스를 통하면 의외로 구매가 쉽다. 선진국 자동차 시장은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경기를 덜 타는 금융을 보완재로 삼는 추세는 이어져 왔다. 2000년대 일본의 도요타는 금융 부문 수익이 자동차 부문 수익보다 더 클 정도였다. 아버지로부터 건설과 반도체가 아닌, 자동차를 물려받은 정몽구 회장으로선 어떻게든 금융을 옆에 끼고 키워야 했다.

금융 업종에는 은행, 보험(생명보험·손해보험), 증권·자산운용, 카드·캐피탈 등이 있다. 다만 1990년대 도입된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 원칙에 따라 은행을 소유하긴 어려웠다. 자동차보험에 필수인 손해보험사는 동생 정몽윤의 몫(현대해상)이었다. 캐피탈(현대캐피탈)은 이미 갖고 있으니 남는 것은 생명보험, 증권, 카드 정도. 생명보험은 덩치가 커 갓 계열 분리한 현대차그룹이 공략하기에 적절치 않은 대상이었고 증권은 2000년 ‘왕자의 난’ 때 욕심을 냈다 쓰디쓴 상처를 입은 바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위시리스트에서 하나씩 지우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카드'. 2001년 정몽구 회장이 대우그룹 계열의 부실 카드사 ‘다이너스티’를 전격 인수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증권과 보험도 탐이 났지만 당시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생존을 위한 결단에 가까웠던 카드업 진출. 하지만 녹록치 않았다. 시장점유율 2%도 안 되는 회사가 적자 규모는 천문학적 수준이었다. 연체율도 두 자릿수에 육박했다. 특급 구원투수가 필요했지만 현대차그룹에 금융 분야 전문경영인은 거의 없었다. 정몽구 회장은 고심 끝에 2003년 둘째 사위 정태영을 투입키로 마음을 굳힌다.

■ 물 만난 정태영, 금융계 스타 CEO 부상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아들 8명, 딸 3명을 낳아 대가(大家)를 이뤘지만 정몽구 회장은 상대적으로 일가가 소박했다. 딸 셋에 늦둥이 아들 하나를 뒀는데 첫째 사위는 의사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거친 그룹 문화에서 믿고 맡길 3세대는 둘째·셋째 사위와 외동아들 정도. 아들 정의선은 당시 30대 초반으로 경험이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둘째 사위 정태영에게 기회가 돌아갔다.(현대하이스코 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셋째 사위는 후일 이혼으로 그룹 승계 구도에서 이탈했다.)

40대 초반의 젊은 CEO 정태영은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해냈다. 디자인 경영으로 업계에 M카드 돌풍을 일으켰다. 출시 1년 만에 신규 회원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03년 카드채 사태로 업계가 초토화 됐을 때 현대카드는 새 역사를 써나갔다. 2004년 1898억원 적자였던 영업이익은 2005년 흑자(288억원)로 돌아섰다. 정태영 사장이 경영을 책임진 지 불과 2년여 만에 일어난 마법 같은 변화다. 재벌가 사위라는 꼬리표는 희미해졌고, 일약 금융계의 스타 CEO로 떠올랐다. 이후 슈퍼 매치, 슈퍼 콘서트 등 이른바 ‘슈퍼 시리즈’로 디자인 경영에 문화 경영까지 결합, 혁신경영의 전도사로 자리매김했다.

반면, 열 살 아래 처남 정의선은 CEO로서의 출발이 순탄치 않았다. 사위의 성공에 고무된 정몽구 회장은 현대모비스 부사장이었던 아들 정의선을 2005년 기아자동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보냈다. 매형보다 사장 명판을 1년 5개월 늦게 팠지만 나이는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 사장 취임 이후 기아차 실적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2006년 1200억원, 2007년 55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뒤 정의선 사장은 2008년 4월 대표이사직에서 일단 물러나야 했다.

2006년 터진 현대차 비자금 사태가 그룹 실적에 악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실적 저조 논란 속에 재벌가 3세의 경영능력에 회의론이 제기된 것도 맞다. 승승장구하던 정태영 사장이 현대차 기획조정실장으로 투입돼 위기를 수습할 것이란 소문이 당시 업계에 파다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정태영 사장이 금융업계를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아차 실적도 2009년 턴어라운드를 이루면서 정의선 사장을 둘러싼 잡음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이후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 내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반면, 정태영 사장의 상승 기세는 꺾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현대라이프생명이 제공했다.

■ 정태영의 '화무십일홍'

현대차그룹은 캐피탈, 카드, 증권에 이어 2012년 생명보험업에 진출한다. 2003년 대신증권으로부터 대신생명을 인수한 GC녹십자는 영업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녹십자생명보험을 매물로 내놨고, 현대차그룹이 이를 낚아챘다. 2000년 계열 분리 당시 언감생심이던 금융 포트폴리오 구축(캐피탈-카드-증권-보험)의 꿈이 12년 만에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자금은 현대모비스(56.15%)와 현대커머셜(34.51%)이 조달했다. 인수 아이디어부터 정태영 사장이 제시했기에 경영권도 그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보험에선 카드와 같은 마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태영 사장은 2012년 현대라이프 출범 당시 ‘2년 내 흑자’를 공언했지만 5년이 지나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000억원씩 두 차례 유상증자에 이어 2015년에는 대만 푸본그룹으로부터 2200억원을 투자받았음에도 좀처럼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적자는 눈덩이처럼 쌓여 2000억원을 넘어섰다.

2010년대 후반은 그룹 주축인 현대차와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자동차 계열사들도 실적 부진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2021년 국제회계기준 IFRS17 도입을 앞두고 현대라이프에 조 단위 자본확충이 필요했는데 그룹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인식됐던 게 사실이다. 회생 여부가 불투명한 보험사에 그룹 자금이 수천억원씩 지원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현대라이프는 점포 폐쇄, 설계사 감축 등 구조조정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보험의 위기는 카드·캐피탈·커머셜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국 주주로서만 역할을 하던 대표이사의 아내(정명이)가 2018년 경영의 전면에 나선다. 그룹의 현대라이프 지원이 끊기면서 경영권은 푸본그룹으로 넘어갔고 회사 이름도 푸본현대생명으로 바뀌었다. 그해 12월 정태영 부회장은 현대라이프 이사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경영 실패의 파장은 컸다. 와이프가 경영에 나선 이상 사위는 그룹의 다른 계열사로 소환될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혁신경영 전도사’ 정태영 부회장의 체면은 제대로 구겨졌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발상의 전환으로 혁신적인 방안을 추구하던 정태영 부회장의 스타일이 보험업에선 오히려 독이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보험의 경우 상품 설계 못지않게 설계사와 판매채널이 중요한데 ‘마트에서 파는 보험’ 같은 반짝 아이디어는 카드업에나 통할 법한 방식”이라고 돌아봤다.

금융권의 다른 관계자는 “비교적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현대라이프의 턴어라운드에 실패했고 그 결과 그룹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측면이 있었다”며 “결국 이런 과정이 현대차그룹이 현대캐피탈을 되가져가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만일 정태영 부회장이 카드에 이어 보험까지 경영에 성공했다면 금융 포트폴리오를 거느리고 계열 분리할 가능성이 커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해 현재 카드와 커머셜로 입지가 쪼그라드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풀이다.

현대캐피탈은 자동차 구매 고객에게 기념품으로 금융계열사 로고가 찍힌 우산을 지급하곤 했다. 2018년까지는 현대라이프와 현대캐피탈 로고가 함께 찍혔다.

한국 경제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는 독특한 집단을 낳았다. 거친 풍파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재벌이지만 ‘부의 대물림’ 시기만큼은 이들도 예외다. 그들이 갈라서고 쪼개질 때 나라 경제가 휘청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가 금융 계열사들의 역할과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왔다. 기업의 흥망성쇠에 결정타가 된 적도 여러 번이다. 자본과 금융시장 역할이 갈수록 긴요해지는 요즘, 재벌가의 숨은 조력자 혹은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던 금융 계열사의 현 주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 재벌 중 하나인 현대차그룹의 금융을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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