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전쟁이 막판으로 치닫는 모양새다. 국내외를 오가는 소송전 7개월째,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이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판결을 내려달라는 LG화학요청에 찬성하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하면서 LG화학이 승기를 잡은 분위기다. 미국 ITC 의견이 조기패소 판정으로 확정될 시 국내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라 소송 맞불로 목소리를 높였던 SK이노베이션으로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번 소송전이 인력 빼가기와 특허침해가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SK이노베이션은 패소판정시 기업 이미지 추락은 물론 도의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간 SK이노베이션은 억울하다는 주장을 펼쳐왔지만 소송 전반적 과정을 보면 비도덕적이라 비춰질 만한 행태가 곳곳에서 드러난 터라 오직 자력으로만 배터리 경쟁력을 갖췄다고 주장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다.
지난 27일 ITC는 OUII가 지난 15일 “LG화학의 조기패소 판결 요청을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는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등 정황을 담은 94개 목록을 담아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조기패소 판결을 내려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한 데 따른 결과물이다. LG화학이 조기 패소 판결을 요청했을 당시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는 뉴스1을 통해 “조직적 증거인멸 사실이 없다”면서 “결과를 보면 알 것”이라 자신감을 보였지만 ITC 내 OUII는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 패소가 적절하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김 대표의 발언에 대한 신뢰도를 추락시킨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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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송진행과정서 불거진 의혹들, 제대로 해소안돼
이같은 상황에 LG화학이 그간 주장해왔던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의혹들은 더욱 힘을 얻는 양상이다. LG화학은 조기 패소 판결 요청 당시 SK이노베이션이 ITC가 명령한 포렌식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면서 이를 증거인멸 및 법적모독행위라고 꼬집은 바다. ITC는 10월 3일 SK이노베이션이 삭제한 문서에서 ‘LG화학 소유의 정보’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를 포함한 소송 관련 모든 정보를 복구하라고 SK이노베이션에 명령했다.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은 데이터 복구·조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LG화학의 주장이었다. 포렌식 진행 시 LG화학 측 전문가가 함께 해야 한다는 ITC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LG화학을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는 것이다.
그간 소송진행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SK이노베이션의 의문스러운 행동들 또한 해소되지 않은 부분이 상당하다. LG화학이 먼저 문제제기를 한 부분은 영업비밀 침해다. SK이노베이션이 76명에 달하는 핵심 인력을 빼가면서 영업비밀을 침해할만한 정황을 보였다는 것이 LG화학 측 주장이다. LG화학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경력 직원 채용과정에서 이력서 양식으로 연구 프로젝트명, 참여 인원 이름과 리더 이름, 성취도 등 LG화학의 내부 사정을 알 만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도록 했다. 더욱이 면접과정 역시 LG화학 출신 지원자들만 SK그룹에서 운영하는 호텔에서 면접을 진행하거나 면접 시간을 저녁 혹은 주말로 배정하는가 하면 면접과정에서도 LG화학 세부 기술 내용이 기재된 발표 자료를 기반으로 지원자가 참여한 주요 프로젝트 내용 등을 제출하는 요건이 있었다는 것이 LG화학의 주장이다. LG화학은 이와 함께 SK이노베이션 채용 과정 당시 LG화학에 근무하고 있던 지원자들이 사내 시스템에 접속, 수백여 건의 핵심기술 관련 문서를 열람, 인쇄, 다운로드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싣는 근거를 내세웠다. 이같은 주장들에 대해 SK이노베이션 측은 지원자들이 낸 자료는 성과를 입증키 위한 수단이었을 뿐 핵심기술 유출이 아니었고, ‘전 직장 정보 활용금지’ 서약서도 두 차례에 걸쳐 받았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를 위반했을 시 채용 취소 등 규정을 두고도 있다고 했지만 채용 취소 사례는 공개된 바도, 알려진 바도 없다. LG화학이 소송을 걸어왔을 때 SK이노베이션은 “면접 과정은 정당했다”고 반박하며 맞소송에 나섰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해 나선 이도, 증거자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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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 발언들마저 부메랑
반면 LG화학은 연이어 증거를 내밀며 SK이노베이션을 압박했다. LG화학은 조기 패소 판결 요청을 하며 내놓은 자료 일부를 국내 매체들에 공개하면서 SK이노베이션이 인력을 빼갔을 뿐 아니라 영업비밀도 편취한 것이라고 자신들의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당시 LG화학이 공개한 자료에는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이 ITC 소송을 제기한 4월29일 ‘[긴급] LG화학 소송 건 관련'이라는 제목으로 사내 메일을 보냈고 “경쟁사 관련 자료를 최대한 빨리 삭제하고 미국법인(SKBA)은 PC 검열·압류가 들어올 수 있으니 더욱 세심히 봐달라. 이 메일도 조치 후 삭제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결국 OUII는 조기 패소 판결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 이유로는 SK이노베이션이 소송관련 증거를 훼손했다고 보기에 타당하다는 점, ITC 포렌식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고 이같은 행위 일부에 ‘고의성’이 있어 보인다고까지 언급했다. 다만 SK이노베이션에게도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며 청문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SK이노베이션도 조사국 OUII 의견이 소명자료를 내기 전에 나온 것이라며 소명을 보면 달라질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어떤 소명자료가 전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 정황이나 OUII의 판단으로 보자면 승기는 분명 LG화학 쪽에 기울어져 있는 상태다. 더욱이 SK이노베이션 김 대표는 앞서 뉴스1과 인터뷰에서 “올해 선임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이 소송전을 이끌고 있다고 LG그룹에서는 주장하는데 그가 영입되기 전인 2017년부터 LG화학에서 내용증명을 보내 ‘영업비밀, 기술정보 등의 유출 가능성이 큰 인력에 대한 채용절차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한 것만 봐도 이미 오래전부터 추진해 온 일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마저도 부메랑이 된 모양새다. 소송 이전, LG화학이 여러 차례 경고를 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 SK이노베이션은 자충수를 둔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을 캐내거나 인력을 빼가기 위한 의도가 없었다 해도 LG화학의 요청을 무시한 것은 상대방에게 의심을 품을 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이기 때문. 더욱이 김 대표는 같은 인터뷰에서 기업의 국제적 명성에 해를 입힐 것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그의 말에 따르더라도 과도한 LG화학 출신 인력 채용은 기업의 국제적 명성과 미래를 생각했다면 ‘적당히’ 했어야 한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물론 누가 옳고 그른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ITC 결정이 남았고 SK이노베이션도 자신들의 정당함을 주장할 기회가 있다. 국내 재판 역시 ITC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난무하지만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SK이노베이션 언행을 보자면 “그런 사실이 없다”는 주장 외에는 신뢰를 줄만한 강력한 한방은 없었다. LG화학 출신 지원자들을 왜 호텔에서 주말이나 저녁에만 면접을 본 것인지에 대한 적극적 해명이나 면접진행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나 증거자료라도 내놨다면 이번 소송전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만이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소송전이 어떤 결말로 맺음될지는 모르겠지만 故구본무 전 회장이 영국 출장지에서 본 2차 전지로 시작됐다는 LG화학 배터리 기술력을 구축해 온 인사들을 대거 채용했다는 점만큼은 도의에 어긋난 행위로 재단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ITC가 LG화학이 제기한 조기패소 판결을 수용할 시 예비판결 단계까지 가지 않고 SK이노베이션은 패소 판결을 받게 되며 이 경우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등 관련 제품에 대한 미국 내 수입금지 효력이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