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의 2024년 비은행 순익 기여도(자료=KB금융)
“금융업은 1997년 IMF 사태 이후 시스템 안정과 인프라 구축 노력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양적·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성과는 낮고 국제 경쟁력은 높지 않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다.”
2015년 3월 금융위원회가 밝힌 금융개혁 정책의 추진 배경이다. 국제 경쟁력이 높지 않다는 판단 근거로는 매년 7월 발표되는 ‘더 뱅커(The Banker)’의 세계 1000대 은행 순위를 들었다. KB금융 68위, 신한금융 69위, 우리금융 75위, 하나금융 84위였다.
10년이 지난 2024년 순위는 어떨까. KB금융 65위, 신한금융 68위, 하나금융 76위, 우리금융 88위다. 얼핏 보면 3~4위 순위만 바뀐 제자리걸음 같지만 속사정을 알고 나면 박한 평가를 주저하게 된다. 지난 10년 사이 중국의 은행들이 비약적인 성장으로 상위권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세계 1000대 은행 가운데 1~4위는 중국공상은행, 중국농업은행, 중국건설은행, 중국은행 등 모두 중국 은행이다. 10년 전 3~4위였던 JP모건체이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는 5~6위로 밀려났다.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의 미국 은행은 아예 10위권 밖으로 이름이 밀려났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4대 금융지주의 순위는 오히려 ‘선방’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우리금융을 빼면 순위가 밀리기는커녕 모두 올랐다. 중국 은행들의 폭풍 공세 속에서도 KB·신한·하나금융이 후퇴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 M&A의 힘 'KB금융'
KB금융의 1위 수성 동력은 ‘M&A’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2014년만 하더라도 총자산이 308조원에 그쳐 신한금융(338조원)은 물론이고 하나금융(315조원)에도 밀렸다. 하나금융이 2012년 외환은행을 인수하면서 그해 바로 자산 규모가 역전됐고 이는 2014년까지 유지됐다.
이른바 ‘KB사태’로 내홍을 거듭하던 위기 상황은 2014년 11월 윤종규 회장의 취임을 계기로 반전을 맞이한다. 업계 2위권의 대형 손보사인 LIG손해보험을 인수하며 단숨에 하나금융을 따돌린 것. 2016년에는 현대증권 M&A에 성공해 KB투자증권과 합병시켰다. 이로써 2017년 자산규모는 KB금융(437조원), 신한금융(426조원), 하나금융(360조원) 순으로 재편됐다. 시가총액도 신한금융을 7년 만에 앞질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20년에는 푸르덴셜생명 인수에 성공해 생명보험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갖췄다. KB금융은 외환은행, ING생명, 우리투자증권 등 대형 M&A 건에서 여러 차례 고배를 마셨지만 2015년 LIG손보 인수부터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현재 KB금융의 비은행 포트폴리오는 4대 금융지주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보험, 증권, 카드 등 비은행 수익 기여도는 40%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신한금융의 2024년 글로벌 사업 현황(자료=신한금융)
■ 혁신DNA 해외로 '신한금융'
2015년 금융개혁 당시 국내 은행지주의 최대 과제는 ‘보수적 금융관행 탈피’였다.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은행들의 전향적인 태도 전환이 필요한데 이자이익 중심의 보수적 경영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인식이었다. 급기야 당국은 금융 역사 최초로 ‘은행의 혁신성’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는데 2015년 1월 긴장감 속에 첫 결과가 나왔다.
일반은행 중에서 신한은행이 1위를 차지했다. 신한은행은 기술금융 확산, 보수적 금융관행 개선, 사회적 책임이행 등 대부분 항목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았다. 특히 혁신점수의 경우 82.65점으로 우리은행(76.8점), 하나은행(72.7점), 국민은행(59.4점)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7개월 뒤 제2차 평가에서도 신한은행은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신한금융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KB금융을 확실히 앞질렀다. 굿모닝증권(2002년), 조흥은행(2003년), LG카드(2006년) 등 2000년대 초중반 진행된 대규모 M&A의 효과가 2010년대 들어 만개했다. 다만, 최근 10년 동안 눈에 띄는 M&A는 2019년 오렌지라이프(구 ING생명) 정도에 그친다. 그럼에도 KB금융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국내 은행지주 톱 브랜드로서의 명성은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최근 10년 간 주목해야 할 신한금융의 독보적 경쟁력은 해외 실적이다. 금융개혁 당시 미래 먹거리 확보를 위한 해외 진출을 적극 독려한 바, 가장 충실히 이행한 금융사 중 한 곳이 신한금융이다. 지난해 해외에서 거둬들인 이익은 7589억원으로, 그룹 전체 이익의 16.8%를 차지한다. 신한베트남은행(2640억원)과 일본 SBJ은행(1486억원)이 절반 이상을 책임졌고 인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도 제2의 ‘베트남 신화’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해외 순익 1조원, 그룹 이익 20%’ 시대가 그리 멀지 않았다.
외환은행 인수 뒤 확장된 하나금융그룹의 글로벌 네트워크(자료=하나금융)
■ 코끼리 삼키는 소화력 '하나금융'
지난 10년 동안 뱅커지(誌)의 세계 1000대 은행 순위가 가장 많이 오른 곳은 하나금융이다. 84위에서 76위로 8계단이나 올랐다. 하나금융이 우리금융을 제치고 국내 3위 금융지주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외환은행 합병 효과에 기인한다. 경쟁 지주사들에 비해 100조원 이상 자산이 부족했지만 2012년 합병으로 단숨에 따라잡았다. 외환은행의 외환·글로벌 네트워크(24개국 127개 영업점)를 흡수함에 따라 해외시장 진출 등 글로벌 역량이 크게 강화됐다.
하지만 외환은행은 인수합병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뒤따르기도 했다. 해외자본 론스타의 은행 인수 자격 문제부터 노조 반발 등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두 은행 간 화학적 결합을 큰 탈 없이 마무리한 이가 현 함영주 회장이다. 2015년 9월 예정보다 빨리 KEB하나은행으로 통합 은행이 출범할 때 초대 행장을 맡았다. 당시 하나은행 충청영업그룹 부행장으로 쟁쟁한 경쟁 후보들에 비하면 무명에 가까웠지만, 경영진은 충청 토박이 고졸 ‘시골촌놈(함 회장 별명)’의 영업력과 친화력을 높이 평가했다.
단자회사에 불과했던 하나은행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외환은행을 합병한 것은 보아뱀이 코끼리를 집어삼킨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당연히 소화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금융은 최근 10년 동안 외적 성장보다는 내적 통합과 효율성 향상에 집중했다. 보험사 등 인수합병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손님 최고, 영업 최고’라는 하나금융만의 독특한 DNA를 새기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하나금융에서 ‘영업통 CEO’는 이제 거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하나금융이 KB와 신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10년을 보냈지만 내공이 축적되는 기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며 “끊임없이 위기와 기회가 밀려오는 것이 금융 바닥이기 때문에 10년 뒤 누가 리딩금융 자리에 있을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한 가전업체가 광고에 사용했던 이 슬로건은 우리나라 광고사에 남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나 경험과 직관을 통해 이 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전에 경영자와 임직원은 수 많은 고민과 검토, 논의를 거듭한다. 그렇게 결행한 신사업 투자, 인수합병(M&A) 등 경영 판단은 10년 후 기업을 바꿔놓는다. 뷰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기업들이 지난 10년 전 내렸던 판단이 현재 어떤 성과로 이어졌는지 추적하고 아울러 앞으로 1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