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6일, 참 보기 드문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국회계기준원(KAI)이 정기 포럼을 진행했는데, 삼성이라는 특정 기업군을 콕 집어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포럼 개최 전에는 ‘공적 기능을 부여받은 사단법인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막상 현장 취재를 해보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이 보였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삼성생명 재경팀은 '신뢰받는 무결점 재무'를 목표로 삼았으나 상황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서울 서초구 삼성생명 본사 건물 복도에 설치된 스탠딩 배너(자료=독자)
삼성생명은 생명보험업계 부동의 1위 기업입니다. 수익성과 건전성 모두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새로운 회계제도가 도입되기 직전인 2022년 12월말 기준 자본적정성 지표인 지급여력(K-ICS)비율은 244.0%로, 경쟁사인 한화생명(162.2%)과 교보생명(180.6%)을 압도했습니다. 새 회계제도가 도입된 2023년 이후에도 다른 보험사들은 경과조치를 적용하며 수치 방어에 급급했지만 삼성생명은 경과조치 없이 도도히 제 갈 길을 갑니다. 금리 하락 등 경영환경 변화로 K-ICS 비율이 조금씩 하락 추세를 보이긴 했지만 작년 상반기까지 200%를 넘기며 자존심을 지킵니다.
그런데 삼성생명 K-ICS 비율이 작년 하반기부터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3분기(193.5%)에 200% 아래로 떨어졌고, 4분기에는 184.9%, 올해 1분기에는 177.2%를 기록합니다. 당국 권고 기준선인 150%에 점차 다가서고 있습니다. 당국의 건전성 기준 강화 등 요구자본은 증가하는데 금리 하락과 수익성 악화로 가용자본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금융당국이 K-ICS 비율 권고기준을 130%로 완화하는 등 건전성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초격차’를 지향해 온 삼성의 일원으로선 자존심이 상할 법했습니다. 재무회계 담당자 입장에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습니다.
■ 삼성생명, K-ICS 비율 급락에 '무리수'
이에 삼성생명 경영지원실 산하 재경팀장은 극복 방안을 꼼꼼하게 마련합니다. 업무 목표를 정해 팀에 공유하고 핵심 내용은 스탠딩 배너를 세워 팀원들이 주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탠딩 배너’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집니다. 모 언론사가 배너 내용을 근거로 ‘한국회계기준원(KAI)이 삼성생명 회계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도합니다. 논란이 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포트폴리오 헷지회계 방법론 수립(4월)
-기준원·감독원 질의 및 의견 확보(7월)
-헷지 실행(12월) → K-ICS비율, 투자손익 제고
첫 번째는 ALM(자산부채종합관리) 관련입니다. 삼성생명이 ALM을 위해 추진한 ‘포트폴리오 헷지회계 방법론’은 기타포괄손익으로 분류된 금리확정형 보험상품의 무위험이자율을 공정가치 위험회피 회계로 재분류하려는 시도입니다. 전문 회계용어라 이해가 쉽지 않은데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손익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당기손익이 아닌 기타포괄손익으로 분류해 오던 항목을 아예 기타포괄손익에서조차도 빼겠다는 의도입니다. 과거 고금리 시절 팔았던 보험상품이 기타포괄손익 안에서 자본을 갉아 먹고 있으니 구석에 박혀 있는 다른 회계 조항이라도 끌어와 어떻게든 자본 항목에서 파내 보겠다는 의지로 읽힙니다.
하지만 이한상 KAI 원장은 이런 시도가 보험회계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식을 벗어난 생각’이라고 지적합니다. 기타포괄손익은 손익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도입됐으므로 공정가치 위험회피회계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삼성생명이 한영회계법인을 통해 KAI에 질의를 해오니 내부 절차에 따라 검토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정책 대응 통한 안정적 CSM 손익 확보>
-CSM 연단위 구분 폐지 추진(보험손익 확대)
-기준서 개정 전 제도개선을 위한 기반 마련
(회계기준원/계리사회 등 공동의견서 작성)
다음은 CSM(보험계약마진) 관련입니다. CSM은 새로운 회계기준에서 보험사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삼성생명 재경팀이 추진한 ‘CSM 연단위 구분 폐지’는 회계의 연도별 손익 구분을 없애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IFRS4에서는 연단위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올해 판 상품이나 10년 전 판 상품이나 평가 시점에 모두 합산해 손익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IFRS17에서는 과거 방식이 너무 모호해 재무적 실재를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으니 최소한 연단위로는 손익을 구분 짓기로 했습니다. 삼성생명 재경팀은 새 회계제도 시행 2년 만에 이 ‘연단위 구분’을 폐지하자는 의견을 개진한 것이고요.
배너에서는 연단위 구분을 폐지하면 왜 보험손익이 확대된다고 했을까요. 사실 엄격히 표현하면 보험손익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확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보험사는 CSM이 급격히 줄어드는 시점마다 수익성이 높은 상품을 집중적으로 팔아 ‘손익 마사지’를 할 수 있습니다. 연단위 구분이 없어지면 필요에 따라 손익 마사지를 통해 손실을 뒤로 미루며 계속 이익이 나고 있는 것처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죠. 연임을 앞둔 CEO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한국회계기준원(KAI)은 회계기준과 관련된 질의가 접수되면 내부절차에 따라 질의회신 작업을 진행합니다. '개인정보보호법'과 내부 규정에 따라 비공개가 원칙인데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외부에 유출이 됐다고 합니다. 이한상 KAI 원장은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자 질의를 제기한 법인의 회계사가 질의철회를 신청해 질의회신 결과가 일반에 공개되는 것을 막았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자료=한국회계기준원)
■ 불리하면 규칙을 바꿔라?
K-ICS 비율을 올려야 하는 삼성생명 재경팀 입장에선 궁여지책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죄는 아니죠. 하지만 이한상 원장은 ‘도가 지나쳤다’고 말합니다. 이 원장은 삼성생명 재경팀의 행위를 “회사가 이익조정(earnings management)을 위한 수단을 개발·실행하고 오피니언 쇼핑(의견 낚시질)을 거쳐 회계기준 개정 로비를 시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규칙에 맞게 회사 회계를 운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회사 회계에 맞게 규칙을 운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IFRS17은 전문가의 판단을 중시하는 ‘원칙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회계처리 이유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기존 IFRS4의 ‘규칙주의’보다 자율성이 높은 체제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삼성생명의 이 같은 시도는 주객이 전도된 나쁜 접근법이라는 것이 이 원장의 견해입니다.
사실 이번 사례만 놓고 보면 열심히 일하다 생긴 ‘해프닝’ 정도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이 아닙니다. 배경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에게는 강한 기시감이 들 겁니다. 유독 삼성그룹 역사에선 ‘불리하면 규칙을 바꿔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관련기사 : 삼성생명 주주·계약자는 두 다리 뻗고 자도 될까) 2004년 삼성생명 지분 19.4%를 보유했던 에버랜드(현 삼성물산)는 금융지주회사로 지정될 위기에 처합니다. 지분법으로 삼성생명의 순자산을 반영시키면 에버랜드의 자산을 능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때마침 에버랜드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계기준이 바뀝니다. 보험업법도 마찬가지죠. 대한민국 모든 보험사들은 이른바 ‘3% 룰’을 지킵니다. 보험사의 자산이 한 회사에 지나치게 집중돼 리스크 전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리합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 8.51%를 갖고도 예외 적용을 받습니다. 금융당국이 법도 아닌 감독규정을 바꿔 편의를 봐준 결과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삼성그룹 역사에서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고 이건희 회장이 그룹을 물려받을 무렵은 금융실명제조차 없던 제도적 미비 시절이어서 각종 문제가 발생해도 로비 등을 통해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경험한 이후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이 바뀌고 법과 제도가 새롭게 정비됩니다. 재벌의 문어발 경영으로 다시 은행이 망하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요. 삼성그룹 3세 승계 시기는 새롭게 법과 제도가 정비되는 시기와 정확히 겹칩니다. 이재용 회장이 시대적 운을 잘못 타고났다고 해야 할까요. 입법, 사법, 행정 모든 분야에서 트러블이 발생합니다. 그때마다 삼성그룹 비서실(전략기획실-미래전략실-사업지원TF)은 총수 일가의 지배력 유지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열일합니다. 그 과정은 서울대학교 박상인 교수가 2022년 발간한 ‘재벌공화국’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 상식 뒤집으려다 입법·사법·행정 모두 '트러블'
물론 삼성생명 재경팀 입장에선 억울할 수 있습니다. 과거 선배들이 해오던 대로 했을 뿐인데 이한상이라는 삐딱한 원장을 만나 운 없게도 문제가 크게 불거지고 전례 없던 ‘삼성생명 포럼’까지 경험하게 됐다고 말이죠.
하지만 이번 사안은 그렇게 운으로만 여길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낡은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않고 하던 대로, 관행대로 하다 보면 앞으로도 계속 트러블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삼성그룹이 법과 원칙과 상식을 계속 뒤집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유배당 상품을 팔았으면 수익을 배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주자본주의 시대에 회사는 지배주주뿐만 아니라 일반주주의 이익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합니다. 자본시장의 파수꾼인 외부감사인은 독립성을 갖고 상식적으로 회계를 처리해 투자자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삼성그룹은 이 모든 상식을 거부하고 뒤집기 위해 혈안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잘못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한 이재용 회장의 진의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준법감시위원회까지 발족시킨 삼성이 정말 준법정신이 있는 것인지 일각에서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명령 불복종을 수치로 여기는 장군들조차 상식을 가벼이 여기다 몰락의 길을 걷는 시대입니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고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험회계 용어가 생소해 낯설어하는 이들이 많다. 보험부채와 관련된 규정은 IFRS17, 금융상품과 관련된 규정은 IFRS9, 자본건전성과 관련된 규정은 K-ICS로 파악하면 이해가 쉽다.(자료=보험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