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스틸컷)
물방울이 모였다. 모인 물방울은 웅덩이가 아닌 해일이 돼 대한민국을 덮쳤다. 작은 물방울들은 자신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다룬 손가락의 주인공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투’ 열풍으로 시작된 성폭력 실상 폭로는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최영미 시인, 김지현, 송하늘, 홍선주까지 이어지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들 뿐인가. 정 ·재계는 물론이고 방송계, 예술계 너나할 것 없이 더 이상 성폭력을 참지 않겠다는 이들의 결단력 있는 행보가 줄을 잇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작금의 사태가 폭로에 그치지 않고 본질적 문제 해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성폭력 앞에 왜 많은 이들이 묵인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는지, 피해자가 도리어 숨어야 했던 사회적 통념과 잘못된 인식들은 어떻게 해야 바뀔 수 있을 것인지 성폭력 사태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본다.-편집자주
[뷰어스=문서영 기자] 지난 1월 24일(미국 현지시간) 유명 의사가 징역 175년형을 받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미국 여자 체조팀 선수들을 성추행, 성폭행한 대표팀 닥터 래리 나사르에게 미시간주 랜싱 법원이 징역 175년형을 선고한 것. 랜싱 법원의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는 선고와 함께 “다시는 감옥 밖으로 나다녀서는 안 된다. 나는 당신의 사형집행장에 서명한 것”이라며 “당신에게 (이같은)선고를 내릴 수 있어 자랑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이 보도가 나오자 국내 여론은 “우리 나라는?”이라 반문했다. 처벌 수위가 낮다는 말도 나온다. 성범죄가 각계 각처에서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성폭력 범죄 통계도 이같은 주장에 힘을 싣는다. ‘범죄백서’에 따르면 ‘더 권위적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로 표현되는 과거보다도 요즘의 성폭력 범죄 발생 비율이 훨씬 높다. 1985년과 1995년의 성폭력 범죄 발생 건수는 각각 5453건과 6174건이었지만 2005년과 2015년에는 각각 1만1757건과 3만1063건으로 늘었다. 법 제도 구축만으로는 성폭력 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다.
(사진=JTBC 방송화면)
그러나 전문가들은 처벌의 수위가 아닌 처벌의 정확성을 꼬집는다. 애매한 기준들이 가해자를 향한 적정한 처벌의 정도를 흐린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의 추가폭로로 도마 위에 오른 이윤택 연출가, 배우 조민기를 비롯해 오태석 연출가 등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들의 성폭력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적용할 수 있는 법적 범위와 처벌 수위를 보면 처벌의 정확성이 중요한 이유가 드러난다.
변호사들에 따르면 이들이 각각 감독, 교수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행했을 경우 우선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로 처벌이 가능하다. 수사 과정 중 피해자들의 거부 의사 표시나 저항에도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 성폭행이나 강제추행이 인정되면서 강간죄 또는 강제추행죄가 적용된다는 것이 법조계의 설명이다. 어떤 죄목이 적용되는가에 따라 처벌수위는 확연히 달라진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의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선고된다. 반면 강제추행죄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다. 물론 범행의 상습성이 인정된다면 형량이 1.5배 가중될 수 있고 성폭력에 저항한 피해자에 부당한 처우가 있었거나 지위를 이용했다면 형법상 강요 혐의 등 가중처벌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같은 죄목들을 입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처벌기준의 명확성과 정확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 한국성폭력상담소 김신아 활동가는 “가해자를 정확하게 처벌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피해자들이 용기있게 신고, 고발했는데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성폭력 통념 등이 개입되면서 피해사실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 법적 판단 기준 역시 협소하다. 일례로 강간의 경우 폭행 협박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폭행 협박을 해석하는 데 따라 다른 문제다. 주먹 흉기 위협만이 아니라 말로 겁박하거나 위해를 가하려 하는 등 가능성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 관점에서 제대로 된 해석이 있어야 정확한 처벌이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KBS2 '마녀의 법정' 방송화면)
■ 가해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매년 늘어나는 성폭력 범죄를 보면 적극적 신고와 대처는 물론, 처벌 수위가 강력해져야 한다는 데에 뜻이 모이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칫 한 사람의 인생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
성폭력 가해자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A(남성)씨는 항소를 준비 중이다. A씨는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서 기다린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급히 정류장으로 내달렸다. 그때 길을 막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쳤다 성추행범이 됐다. A씨는 길을 비켜달라며 어깨를 툭 쳤다고 주장하고 피해자인 50대 여성은 브래지어 끈을 만졌다며 성추행이라 주장했다. 결국 A씨 어머니까지 다툼에 휘말렸고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가게 됐다. 법원은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A씨는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더 큰 문제는 신상정보공개다. 현행법상 성범죄자는 신상정보가 공개되기 때문. 동시에 벌금형이라도 범죄이력이 남기 때문에 학원 강사 등으로는 취업이 불가하다. 변호사에 따르면 A씨는 억울한 일이지만 해당 여성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신체 접촉을 한 내 잘못도 있기에 벌금을 내라면 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신상정보까지 공개되는 것은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라며 항소에 나서게 됐다. A씨 변호사는 “성범죄의 경우 여성의 신체를 접촉했을 때 해당 여성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 여성의 진술이 일관되는가가 처벌의 잣대로 작용한다. A씨가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처벌에 있어 과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A씨는 분명 피해자는 아니지만 이같은 경우 처벌의 수위 조절도 필요하다는 것. 많은 법조인들이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다른 변호사도 “성추행, 성희롱 관련 사건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진위 여부가 명확히 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면서 “목격자가 흔치 않은 사건 특성상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 기억을 토대로 해야 하는데 이를 작정하고 악용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성폭력법 안에서 애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셈이다. 성추행에 대한 폭로와 대처가 활발해진 만큼 신중한 판단과 사안에 따른 처벌 수위가 정립되어야 할 때”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사진=YTN 방송화면)
■ 절대 희석돼선 안될 것
또 한가지. 곳곳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나온다. 법조계는 물론 문화계에서도 성폭력 사건 폭로들이 이슈로만 여겨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법조계는 서지현 검사의 폭로는 중요한 일이었고, 사회적으로 좌시돼선 절대 안될 문제지만 이로 인해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묻힌 모양새라 우려하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들의 성향을 뒷조사했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수사 보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성추행 폭로 전만 못하다. 이와 관련해 한 변호사는 “얼마 전 법조계 동기들과 다같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면서 “서지현 검사를 필두로 한 성폭력 문제는 당연히 다뤄져야 할 문제다. 사건의 경중을 가릴 수 없는 사안이지만 이 폭로로 인해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진 부분은 아쉽다. 일부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물타기가 되어 버렸다는 말도 나온다. 성폭력 문제는 당연히 명확한 처벌과 개선이 필요한 일이지만 법조계의 존재를 뒤흔든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관심도 언론과 대중이 잊지 말아줬으면 한다. 지금이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인데 자칫 이 기회를 놓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문화계도 마찬가지다. 용기있는 폭로자들로 인해 문화계 다양한 권위자들의 성벽이 무너졌다. 그러나 성폭력 행위와 수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연극계 관계자는 “현재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양상을 보면 사건 가해자의 행위, 수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화제성과 더불어 자극적인 부분들만 집중되고 있는 모양새가 안타깝다”면서 “지금까지의 사태만 봐도 이 업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성범죄가 당연하다는 듯 발생했고 묵인됐는지가 드러난다. 관행의 문제고 구조적 문제다. 이런 추악한 범죄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적, 제도적 개선은 물론이고 연극계의 엄중한 처벌기준과 원칙이 새로이 세워져야 할 때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단의 한 인사도 “작품성, 업적만으로 모든 걸 쉬쉬해주는 분위기는 사라져야 할 때다. 작품은 작품만으로 가치를 인정받더라도 인간성까지 작품성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이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자성과 자정 노력을 이어가야 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미미한 정도다. 아직은 충격에 빠져있어서일 거라 생각한다. 꼭 고쳐지고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이 이슈에 묻혀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했다.